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53) 공명(共鳴)

[우리 말에 마음쓰기 863] '여심(旅心)'와 '여행마음'

등록 2010.02.19 10:55수정 2010.02.1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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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여심(旅心)

.. <일본서기>를 무슨 필요에 의해서 펼치게 되면 그럴 적마다 이 섬 이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이 매번 겹치는 것도 여심(旅心)을 부추기게 되는 법이다 ..  <시바 료타로/박이엽 옮김-탐라 기행>(학고재,1998) 12쪽


"무슨 필요(必要)에 의(依)해서"는 "무슨 까닭 때문에"나 "무슨 일이 있어서"나 "무언가 찾아 읽으려고"로 다듬습니다. "만나게 되는 것이다"는 "만나게 된다"로 손보고, '매번(每番)'은 '늘'이나 '언제나'로 손보며, "겹치는 것도"는 "겹치는 일 또한"이나 "겹칠 때면"으로 손봅니다.

 ┌ 여심(旅心) = 여정(旅情)
 ├ 여정(旅情) : 여행할 때 느끼게 되는 외로움이나 시름 따위의 감정
 │   - 여정을 달래다 / 기차에 몸을 실으니 여정이 한층 깊어진다
 │
 ├ 여심(旅心)을 부추기게
 │→ 여행하고픈 마음을 부추기게
 │→ 여행하라고 부추기게
 │→ 길을 떠나라고 부추기게
 │→ 길을 나서라고 부추기게
 └ …

한글로 '여심'이라고만 적으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넣어 준다 해서 더 잘 알 수 있지 않습니다. 한자말 '여심'은 두 가지 있다고 국어사전에 실려 있는데, 여자 마음을 가리키는 '여심'을 한글로만 적든, 한자를 묶음표에 넣어 '여심(女心)'으로 적든, 한자로 '女心'으로 적든, 우리 말이라 일컫기 어렵습니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마음은 '여행하는 마음'이라 할 때가 가장 알맞고, 여자가 품는 마음은 '여자 마음'이라 할 때가 가장 알맞습니다.

설마 싶어서 국어사전에서 '남심(男心)'이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이런 낱말은 없다고 합니다. 여자 마음을 '여심'이라 적으려면,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 마음을 '남심'으로 적어야 할 텐데, 서로 짝을 짓도록 한다며 억지로 '남심'이라는 낱말을 짓는다 하여도 그리 알맞아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한 낱말로 삼을 까닭이 없다고 느끼며, 한 낱말로 삼고 싶다면 '여자마음/남자마음'처럼 적어야 한다고 봅니다.


 ┌ 여정을 달래다
 │
 │→ 여행하는 마음을 달래다
 │→ 외로움을 달래다
 │→ 여행하는 외로움을 달래다
 └ …

한자말 '旅心'을 다시금 헤아려 봅니다. "여행하며 느끼는 외로움이나 시름"을 가리킨다는 말뜻을 곱씹어 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 느끼는 … 감정"이라고 적었는데, 이 자리에 나오는 '감정(感情)'을 거듭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이라는 풀이가 달립니다. 그러니까, 국어사전 말풀이에서 "… 느끼는 … 느낌"이라고 적은 셈입니다. 말풀이부터 겹말입니다. 퍽 많은 사람들은 국어사전 말풀이부터 엉터리 겹말이 되어 있는 줄 못 깨닫고 있을 텐데, 아무래도 이런 엉터리 말풀이에 익숙해지거나 길들면서 더더욱 우리 말을 알맞거나 올바르게 쓰는 길하고 멀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 여행마음
 ├ 여행시름
 ├ 외로움과 시름
 └ …

쓰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행마음'이나 '여행시름'처럼 한 낱말로 적으면 어떠할까 생각합니다. 또는 "외로움과 시름"처럼 적으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한자를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며 새말을 빚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가 늘 쓰고 누구나 아는 손쉬운 낱말을 엮어서 새말을 빚어내면 어떻겠느냐고 하나하나 톺아봅니다. 우리 나름대로 해 보려고 해야 일굴 수 있는 글이요, 우리 깜냥껏 슬기를 뽐내려고 해야 가꿀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자꾸자꾸 바깥말에 기대려고 하지 말고, 끝없이 바깥글에 매이지 말며, 우리 손으로 우리 삶과 마음을 담아낼 가장 알맞춤할 낱말과 말투를 이끌어 내야 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ㄴ. 공명(共鳴)

..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공명(共鳴)할 수 없다. 연기는 노력과 기술이다 ..  <윤진영-다시, 칸타빌레>(텍스트,2009) 36쪽

'이해(理解)할'은 '헤아릴'이나 '생각할'이나 '받아들일'로 다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 마음"으로 다듬습니다. "노력(努力)과 기술(技術)이다"는 "땀과 재주이다"나 "흘린 땀과 쏟은 품이다"로 손질하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 공명(共鳴) : 남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함
 │   - 그녀의 사상에 나는 많은 공명을 느꼈었다
 │
 ├ 다른 사람의 마음과 공명(共鳴)할
 │→ 다른 사람 마음을 따를
 │→ 다른 사람 마음과 하나될
 │→ 다른 사람 마음과 만날
 │→ 다른 사람 마음과 어울릴
 │→ 다른 사람 마음과 어우러질
 └ …

뜬금없다고 여기는 분한테는 뜬금없을 이야기입니다만, 고속철도가 망가뜨리는 산과 들과 내와 삶터는 한두 곳이 아닙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철길을 줄였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느긋하게 돌아가는 마음을 잃은 한편, 더 빨리 간다고 하는 한 시간 반 남짓은 우리를 더 넉넉하거나 푸지게 이끌지 못합니다. 빠른 철길은 서울과 부산을 점과 점으로 여기게 하면서, 둘을 잇는 길이 우리 이웃 삶터요 우리 스스로 살아가는 터전임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점과 점을 잇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흐름이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도록 내몹니다.

이 같은 우리 삶인 탓이 아닌가 싶은데, 너나 없이 더 빨리빨리만 외치고 달려들면서 우리 삶을 차분하게 가다듬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내 삶을 차분하게 가다듬지 못하니, 우리 스스로 내 생각과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지 못합니다. 이에 따라 저절로 우리 말과 글을 차분하게 가다듬지 못합니다. 돈에 끄달리는 삶자락 그대로 내 생각과 말이 일그러집니다. 이름값에 휘둘리는 삶결 그대로 내 마음과 글이 얼룩집니다. 권력에 휩쓸리는 삶매무새 그대로 내 넋과 이야기가 굴러떨어집니다.

 ┌ 그녀의 사상에 나는 많은 공명을 느꼈었다
 │
 │→ 나는 그 여자 생각을 깊이 받아들인다고 느꼈었다
 │→ 나는 그 여자 생각을 깊이 받아들였었다
 │→ 나는 그 여자 생각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 …

<초록의 공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더없이 즐겁게 읽으며 반갑게 새겼습니다만, 책이름은 가슴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 책이름을 놓고 가슴이 짠하게 울린 분이 많았으리라 봅니다만, 저로서는 왜 '초록 + 의 + 공명'으로밖에 생각줄기가 이어지지 못했나 싶어 안타깝습니다. 우리 말은 '녹색'도 '초록'도 아닌 '푸름'이나 '풀빛'이나 '푸른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은 '울림'이나 '적심'이나 '깨우침'이나 '하나됨'이나 '열림'이나 '어울림' 들이지 '공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쓴이와 엮은이가 생각줄기를 조금 더 이었다면 "푸른 울림"이나 "푸른 어울림"이나 "풀빛 생각"이나 "풀빛으로 하나됨"이나 "푸르게 어깨동무"나 "푸르게 열림"이나 "푸르게 적심"처럼 이름을 붙이며 참뜻과 제뜻이 살아나도록 마무리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푸른 목소리"나 "푸른 산울림"이나 "푸른 이슬방울"이나 "푸른 빛줄기"나 "푸른 바람"이나 "푸른 산줄기"나 "푸른 골짜기" 같은 말마디를 떠올릴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푸른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푸른 길을 걷자며 손을 내미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습니다. 푸른 목소리를 내거나 푸른 마음을 펼치거나 푸른 글을 적바림하는 사람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푸른 믿음을 선보이거나 푸른 사랑을 나누는 몸짓은 이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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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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