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여는 순간, 중세 유럽이 다가온다

[리뷰] 자비네 바이간트 <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

등록 2010.03.22 10:22수정 2010.03.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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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 겉표지 ⓒ 강

발푸르가는 서기 870년에 교황 하드리안 2세에 의해서 성인이 된 베네딕트회 수녀다. 독일의 전설에 따르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마녀와 온갖 악마들이 브로켄 산에서 춤을 추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 악령들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준 성인이 바로 발푸르가다. 이 성인을 기리기 위한 축제가 지금도 매년 유럽에서 열린다고 한다.


이런 성인의 신체 일부가 담긴 유물이 있다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이 유물을 갖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특히나 종교의 시대였던 중세라면 말할 것도 없다.

성물을 갖는다는 것은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승에서는 행복과 건강을 주고, 저승에서는 낙원의 입장권 역할을 하는 것이 성물이다.

성녀 발푸르가는 죽어서 독일의 아이히슈테트에 묻혔다. '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는 뚜껑이 달린 작은 병 모양의 성물이다. 진주가 박혀있고 금줄이 달려있어서 목에 걸 수 있다. 작은 병에는 성녀의 묘석에서 추출해낸 신비로운 치유력을 지닌 기름이 담겨 있다.

모든 성물이 그렇듯이, 이 발푸르가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고 한다. 성물을 가지고 있으면 행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불행에 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자비네 바이간트의 2006년 작품 <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는 이 성유물을 소재로 한다. 오래 전에 죽은 성인의 유물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져 왔을까?

치유력과 행운을 가진 성인의 유물


<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는 2004년 독일의 슈바바흐 지역에서 시작된다. 맥주와 보드카에 취한 10대 소년 세 명이, 밤에 이 지역의 한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서와 성가집을 잔뜩 쌓아놓고 불에 태워버린다.

다행히 불은 성당 건물을 태울 정도로 번지지는 않았다. 다음 날 성당은 발칵 뒤집혔고 경찰은 이 지역의 청소년들이 못된 장난을 했을 거라고 말한다. 성당의 신부는 이런 심각한 악행을 장난이라고 표현할 수 있냐고 화를 낸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성당의 위원회에서는 이런 일에 대비하기 위해 성당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보물들을 지역 박물관에 대여하기로 결정한다. 박물관에는 많은 경보장치들이 있으니 적어도 성당보다는 안전하게 이런 물건들을 보관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박물관장 뫼비우스는 흥분된 심정으로 이 물건들을 받아들인다. 물건들 중에는 배가 불룩한 병 모양의 은제 펜던트가 달려 있는 목걸이도 있다. 원래는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지만, 그 보석은 오래 전에 누군가가 떼어내 버린 모양이다. 뫼비우스는 이 목걸이에 관심을 갖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함께 보관된 양피지에서 '오버볼커스도르프 성'이란 단어만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흥미를 느낀 뫼비우스는 차를 몰고 그 성으로 향한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그 성의 안마당에서 아마추어 극단이 가끔 연극을 상연하고 있다. 이중 나무문이 달린 성벽 뒤로 자그마한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창에 달린 덧문들은 프랑크 지방의 관습을 따라 붉은 색과 흰 색으로 칠해져 있다. 건물 측면에는 세 개의 낮은 탑들이 솟아 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나른한 중세의 일상

뫼비우스는 성의 마당에서 낮잠에 빠져들고 무대는 500년 전의 유럽으로 이동한다. 중세 시대 알프스 북쪽의 몇 안되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도시이자 독일의 가장 중요한 상업도시인 뉘른베르크, 심해의 가장자리로 몰려드는 파도 한가운데 여왕처럼 서 있는 도시 베네치아가 그 무대다.

당시 페그니츠 강변에 위치한 뉘른베르크는 8천이 넘는 가구와 4만 명 가량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격동하는 삶이 있고 황제나 교황의 지시도 받지 않는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상인 집단이 전세계와 교역하는 도시였다.

베네치아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화려하며 진기한 도시, 바닷속의 수많은 섬들 위에 세워진 도시, 반짝이는 운하들이 촘촘하게 뻗어있고 수백 개의 다리들이 그 위를 지나가는 도시, 숨 막히도록 장려한 성들과 온갖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였다.

작가 자비네 바이간트는 이 두 도시를 배경으로 두 쌍의 남녀가 벌이는 사랑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사랑이야기와 함께 페스트와 전염병이 휩쓸고 간 유럽, 향긋한 포도주 향이 감도는 술집과 악취나는 뒷골목의 풍경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책을 열면 중세의 유럽이 눈 앞에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 1, 2. 자비네 바이간트 지음 / 이재영 옮김. 강 펴냄.


덧붙이는 글 <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 1, 2. 자비네 바이간트 지음 / 이재영 옮김. 강 펴냄.

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 1

자비네 바이간트 지음, 이재영 옮김,
강, 2010


#발푸르가의 진주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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