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쓴 겹말 손질 (87) 죽은 시체

[우리 말에 마음쓰기 891] '모여서 토론을 행했던 회의', '연세와 나이' 다듬기

등록 2010.03.31 09:54수정 2010.03.3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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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모여서 토론을 행했던 회의

.. 이것은 최근에 생명과학의 두드러진 발전에 따라 그것이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검토할 목적을 가지고 정상회담 가맹국인 7개국 대표가 모여서 토론을 행했던 회의이다 ..  <가와이 하야오/김동원 옮김-종교와 과학의 접점>(솔밭,1991) 113쪽


'최근(最近)에'는 '요사이에'나 '요즈음에'나 '요즈막에'로 손보고, "생명과학의 두드러진 발전(發展)에 따라"는 "생명과학이 두드러지게 발돋움함에 따라"로 손봅니다. "인간(人間)의 생명(生命)과 인간(人間)의 존엄(尊嚴)"은 "사람 목숨과 사람 자리"나 "우리 목숨과 사람이라는 값어치"로 손질합니다. "영향에 대(對)해서 검토(檢討)할 목적(目的)으로"는 "영향을 헤아려 볼 생각으로"나 "영향을 살펴보고자"로 다듬고, "정상회담 가맹국(加盟國)인 7개국(七個國) 대표"는 "정상회담을 함께하는 일곱 나라 대표"로 다듬습니다. '행(行)했던'은 '했던'으로 고칩니다.

 ┌ 토론(討論) :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각각 의견을 말하며 논의함
 │   - 찬반 토론 / 정책 토론
 ├ 회의(會議)
 │  (1) 여럿이 모여 의논함
 │   - 회의를 소집하다
 │  (2) 어떤 사항을 여럿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여 의논하는 기관
 │   - 법관 회의
 │
 ├ 7개국 대표가 모여서 토론을 행했던 회의이다
 │→ 일곱 나라 대표가 모였던 자리이다
 │→ 일곱 나라 우두머리가 모여서 나눈 이야기이다
 └ …

'토론'이든 '회의'이든 한자말입니다. 이 한자말을 안 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보기글처럼 "토론을 행했던 회의"처럼 적으면 겹치기가 되어요. 둘 가운데 하나는 덜어 주어야 알맞습니다. "일곱 나라 대표가 모여서 했던 토론이다"처럼 적든지 "일곱 나라 대표가 모였던 회의이다"처럼 적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토론이나 회의 모두 "사람들이 모이는 일"입니다. 그러니, "모이는 토론"이나 "모이는 회의"처럼 적어도 겹치기 말투인 셈입니다.

이리하여, '토론'과 '행(行)하다'와 '회의' 모두 덜어낸 다음, "모였던 자리이다"쯤으로 고쳐쓰거나 "모여서 나눈 이야기이다"쯤으로 고쳐 줍니다.

단출하게 가다듬고 올바르게 가누며 슬기롭게 가꿀 말마디가 되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면 좋겠습니다.


ㄴ. 연세와 나이

.. 연세 드신 분들이 다 그렇겠지만 우리 어머니도 나이가 들수록 아픈 곳이 늘어 간다 ..  <은종복-풀무질, 세상을 벼리다>(이후,2010) 104쪽


"나의 어머니"라 하지 않고 "우리 어머니"라 한 대목이 반갑습니다. 이와 같이 적어야 올바르지만, 이와 같이 적을 줄 모르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 연세(年歲) : '나이'의 높임말
 │   - 연세가 많다 / 할아버지께선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
 ├ 연세 드신 분
 │→ 나이 드신 분
 │→ 나이 많은 분
 └ …

글쓴이는 첫머리에 '연세' 드신 분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다가는 우리 어머니 '나이'를 이야기합니다. '나이'를 높이는 낱말이라는 '연세'를 쓰고자 했다면 글월 뒤쪽에서도 '연세'를 적어야 알맞겠지요. 그런데 '나이'라는 낱말은 낮춤말이 아닙니다. 누구한테나 고르게 쓰는 낱말입니다. "나이 먹다"라 하면 여느 자리나 손아랫사람한테 쓰는 말투가 되고, "나이 들다"라 하면 손윗사람한테 쓰는 말투가 됩니다.

 ┌ 나이 든 분 / 나이 드신 분
 └ 나이 많은 분 / 나이 많으신 분

조금 더 생각을 기울여 보면, "나이 들다"보다 "나이 드시다"라 하면 한결 높이는 말투가 됩니다. "나이 많다"보다 "나이 많으시다"라 하면 더욱 높이는 말투가 됩니다.

낱말 하나하나를 좀더 알맞게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투 하나하나를 더 찬찬히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월 앞뒤에 같은 낱말이 오지 않도록 맞추려 했다면, "나이 드신 분들이 다 그렇겠지만 우리 어머니도 해가 갈수록"처럼 적어 줍니다.

ㄷ. 죽은 시체

.. 노근리 쌍굴에 갇혔던 사람들은 먹을 물이 없어 죽은 사람에게서 나온 핏물을 받아먹기도 하고, 죽은 시체를 굴 들머리에 쌓아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알을 막았다 ..  <은종복-풀무질, 세상을 벼리다>(이후,2010) 236쪽

우리 말은 '먹을 물'이나 '마실 물'입니다. 이 보기글처럼 '먹을 물'이라 적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식수(食水)'라는 바깥말을 즐겨쓰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우리 말과 넋과 문화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모습이요, 우리 글과 얼과 터전을 살뜰히 돌보지 못하는 매무새입니다.

 ┌ 시체(屍體) = 송장
 │   - 시체를 화장하다 / 시체를 바닷속에 수장하다
 │
 ├ 죽은 시체를
 │→ 죽은 사람을
 │→ 송장을
 │→ 주검을
 └ …

보기글을 가만히 살피면 첫머리에 '죽은 사람'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곧이어 '죽은 시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시체'란 '송장'을 가리키는 한자말이요, '송장'이란 바로 "죽은 사람 몸뚱이"입니다. 이 글에서는 "죽은 사람 몸뚱이를 굴 들머리에 쌓아" 놓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죽은 사람 몸뚱이"로 적든지 "죽은 사람"으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죽은 시체'란 "죽은 죽은 사람 몸뚱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은 시체"처럼 겹말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제법 있습니다. 한자말 '시체'를 쓰고 싶다면 그냥 '시체'라고만 해야 하는데 자꾸자꾸 "죽은 시체"처럼 씁니다. 더욱이 오늘날 꽤 많은 사람들은 우리 말 '송장'을 모릅니다. 우리 말은 '송장'이요, 한자로 지은 바깥말이 '屍體'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또다른 우리 말 '주검'이 있음은 아예 헤아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껍데기는 한국사람이지만 알맹이는 한국사람다운 한국말을 나누지 못한다고 할까요. 몸뚱이는 한겨레이지만 넋으로는 한겨레다운 한국글을 주고받지 못한다고 할까요.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말 아름다운 나라 아름다운 겨레 아름다운 마을로 차츰차츰 거듭나면서 아름다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겹말 #중복표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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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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