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엔 해부도 상관없다는 말을 던지던 민우기 대감이 다음날엔 해부해선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집안의 일이 밖에 알려지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네. 집안사람들 얘기론 그 화자허인가 하는 놈이 이충원(李忠轅) 대감 댁에서 사고를 친 모양인데 그 댁에서도 소문날 걸 생각해 쉬쉬 입을 막았다들었네. 그토록 흉악한 짓을 한 놈이 말 한마디 않고 쫓겨난 걸 보면 독종은 독종인 모양이야. 그렇듯 우유부단한 성격이니 음란서생이란 풍설가 노릇을 하는 것이겠지만서두! 어험!"
일이 이쯤 됐으면 딱 부러지게 무슨 말인가를 할 듯 싶었는데 화자허는 입을 다문 채 묵묵부답이었다. 민우기 대감이 해부는 안 된다 했으니 함부로 칼을 댈 수 없는 노릇이라 일단은 현장을 돌아볼 수밖에 다른 방편이 없었다. 몸채 쪽 청소를 하는 쇠돌 아범이 새로운 정황을 내놓았다.
"이레 전인가···, 이놈이 이(齒)가 아파 집안 청소를 못할 때였어요. 낮엔 잠을 자고 밤엔 고통이 심한지라 한숨도 잘 수 없었지요. 가만있으면 고통이 심해 마당으로 나가 여기 저기 돌아다닐 때였는데, 중문을 벗어나자 기와장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지 않겠어요. 해서, 가만 가만 다가가니 누군가 담장을 넘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누군지 알겠는가?"
"모르지요. 담 넘어가는 뒷모습만 보았으니까요. 황급히 쫓아가자 이쪽에서 달려오는 낌새를 눈치 챈 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어요. 이상하다는 생각에 돌아서는데 담장 아래 쥘부채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지요."
"쥘부채? 그건 어디 있는가?"
"다음날 도련님께 드렸지요. 도련님은 무척 놀란 표정이더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잊고 있었습니다만."
"담 너머는 어디로 통하는가?"
"큰 길로 빠지거나 숲길이지요. 나무가 빽빽이 들어 차 있어 숲을 뚫고 들어와 담을 넘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둘러보았네만 그런 것 같네."
정약용은 담 너머를 휘둘러보며 항인(行人)에게 눈길을 주었다. 항인이 즉시 담을 뛰어넘었다.
"한데 말이네, 쇠돌 아범. 그 후론 담을 넘거나 들어오는 자를 보지 못했는가?"
"못 봤습지요. 작은 도련님께 말 했으니 더 이상 이놈이 나선다는 게 격에 맞지 않는다 생각했구요."
"알겠네. 별당은 작은 공간이 아닌데 아씨가 청소할 리 없고, 누가 청소를 하는가?"
"이틀에 한 번 부엌일을 하는 유월이가 합니다만, 요 근래엔 별당 아씨께서 오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했답니다."
"어젠 어쨌는가?"
유월이가 머뭇거렸다.
"어···젠 아가씨 몸이 불편하시다고 쇤네에게 청소를 맡겼습니다. 큰 방과 작은 방 청소까지 해줬습니다만, 아씨께선 가능한 한 청소를 빨리 하라는 말씀이 있어 정성스럽게 닦지는 못하고 대충 먼지만 털었습니다."
"유월이가 청소할 때엔 촛대의 황촉을 끼었느냐?"
"노란 황촉으로 새 것을 끼었습니다."
"두께는 어느 정도냐? 이 정도냐?"
정약용이 왼손 엄지와 검지로 굵기의 두께를 정하자 유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볼 말이 더 없으니 일하러 가도 좋네."
그때 담을 넘어간 항인이 돌아왔다. 그의 손엔 쥘부채가 쥐어져 있었다. 선추가 달린 부채살엔 두 편의 글귀가 써 있었다. 두 사람이 쓴 것으로 생각될 만큼 시구의 서체는 완연히 달랐다. 첫째 시구는 장일도여수(長日度與誰)이고 그 아래쪽 시구는 추각수미취(皺却愁眉翠)였다. 위의 시구는 '긴긴 밤을 누구와 함께 지내며'라는 뜻이고, 아래쪽에 있는 건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였다.
시구는 미인원(美人怨)으로 깊은 밤 미인 홀로 지내야 하는 원망어린 글귀다. 제목은 그렇다 해도 글을 쓴 이는 고려조의 문신 이규보였다. 송화가 사념의 폭을 넓혀갔다.
"제 생각을 나으리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쥘부채에 쓰인 시구는 회문시(回文詩)로 사랑하는 남녀가 상대의 참마음을 알고자 위의 시구에서 한 행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시구를 보낸 쪽의 내용을 뒤집어 보내므로 쥘 부채에 쓰인 시구의 회문은 잘못된 게 분명합니다. 이규보의 미인원(美人怨)이 담 너머에 있었던 건 본래 쥘 부채의 시구는 여인이 썼던 것으로 보이며 거기에 회문의 답장을 한 것은 사내로 보입니다. 그렇게 볼 때, 쥘부채가 버려진 것도 답장이 잘못 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송화의 말에 따르면 여인이 썼던 첫 행의 시구는 '긴긴 밤을 누구와 함께 지내며(長日度與誰)'다. 회문 시는 '뉘와 함께 긴긴 밤을 지내여 볼까(誰與度日長)'가 바른 법이다. 그렇다면 이 쥘부채는 누구 것인가? 집안사람의 것이 아닌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날 유월이를 만난 송화는 근자에 집안 사정이 어떠했는가를 물었다.
"큰 서방님이 비명이 돌아가신 뒤 집안 분위기가 음울했습니다. 나으리와 마님 사이도 냉랭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점쟁이 여인으로부터 받은 경고를 남편이 무시했다는 데 있었으나 민우기 대감 생각은 달랐다. 점법이란 참으로 허랑하다는 것이다. 적당히 주절거린 게 집안에 생긴 변고가 맞았지만, 그렇다고 전폭적으로 믿는 건 아니었다. 그 점이 부인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매듭짓지 못했다.
"모든 게 큰 서방님이 돌아가신 게 원인이지요. 그 일만 아니면 집안이 이토록 냉랭하지 않았겠지요."
"자네 이름이 유월이라 했던가?"
"예에, 아가씨."
"어제 별당에 있는 큰 며느리 방을 청소했다 했는데 수상한 점이나 평소와 다른 점은 발견치 못했는가?"
"다른 점이라면···, 아씨께서 자신이 직접 청소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 외엔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청소만 해줬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평소와 달리 내 뒤를 따라다니잖아요. 내가 물건을 도둑질 할 것처럼 느껴 무척 서운했지만 종년이 따진들 득될 게 있겠어요. 가지고 간 황촉(黃燭)만 촛대에 끼우고 돌아섰지요."
"황촉이라?"
"불 켜는 초 말입니다."
"자네가 항상 끼는가?"
"아닙니다. 별당 아씨가 끼겠지요. 어제는 내가 가지고 간데다 촛대가 비웠기에 그걸 끼웠어요."
"두께와 길이는 어느 정돈가?"
"길이는 어느 황촉이나 같겠지만 두께는 보통 물건보다 두 배는 돼 보였어요. 황촉이 탈 때 그윽한 냄새가 나므로 향초(香燭)라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두 마리 봉황과 같은 새가 조각돼 있어 비쌀 거라 생각 했거든요."
"나도 본 적 있네. 그것은 일반 물건보다 다섯 배나 비싼것이네. 아들을 잃고서도 부인께선 그런 것까지 마음을 쓰는 구만."
"그건 마님께서 주신 게 아니고 둘째 도련님이 주셨어요. 이틀 전 별당 아씨 방에 황촉이 몇 개 있는가 물으시고 다음날 황촉을 사오시더니 내게 갖다놓으라 했거든요. 이상한 일은, 아씨가 변을 당한 후 그 방에 들어갔는데 세 자루의 황촉이 하나도 보이지 않던데요. 발이 달려 어디로 날아갈 리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에요. 보름 전 이른 초저녁에 중문을 지나 별당 쪽을 보았는데 불이 꺼져 있지 뭐예요. 불을 켤 초가 떨어졌기 때문이라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작은 도련님이 황촉을 주실 때 내가 서둘러 갖다 드린 거예요."
송화의 보고를 받은 정약용은 다른 검시기록에 적혀 있는 검안서(檢案書)를 펼쳤다. 용인에 사는 노수영(盧秀鍈)이라는 자가 격쟁을 신청해 복검한 용인 현감의 검시기록이었다.
<홀로 있는 여인을 겁간하기 위한 방법에 무슨 수가 있을까를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이번 사건에서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그 하나는 마비산(麻沸散)이다. 이것은 사람의 정신을 미혹시키는 약재로 예전엔 환자들을 수술할 때 많이 이용했다. 마비산은 여섯 종류의 식물을 조제해 환자를 전신마취 시킨다. 시중엔 침마취(鍼麻醉)가 유행하지만 가끔은 양금화(洋金花)를 이용한 중약마취가 선을 보인다. 마비산의 주성분인 양금화는 '민 독말풀'이다. 삭과(削科)의 꽃을 피우는 이 식물은 우리나라 환경에 잘 자란다. 어느 곳에든 심어놓으면 스스로 종자를 떨어뜨려 이듬해 꽃을 피운다. 문제는 이 마비산을 향초에 이용한다는 점이다. 촉심(燭芯)을 마비산 물로 몇 번이나 우려내 사용할 경우 강한 중독 현상이 일어난다.>
상황은 이러했지만 유월이가 건넸다는 세 자루의 황촉이 나타나지 않은 이상 그것을 증명할 길이 막연했다. 그 향초가 켜졌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타들어갈 때엔 침입자를 정상적으로 방어한다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음란선생 화자허가 초저녁에 민대감과 대화를 나눴으니 사건이 일어난 시각은 7시에서 9시 사이인 술시(戌時) 어림이다. 그 시각에 누가 별당에 침입했는가? 일단 가까운 사람부터 소재증명에 나섰다.
민우기 대감의 둘째 아들 민지운(閔智雲)이 다니는 취도(醉道)란 사설교습소는 민무구(閔武垢)가 세운 교육기관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민씨 일문은 한때 그 위세가 시들했으나 그런대로 가통은 튼튼하게 이어오고 있었다.
그곳을 취도라 한 건 술을 먹어도 도를 지킬 줄 안다면 학문에 전념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는 당장 이곳을 그만 둬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자식들을 이곳에 맡긴 부모들은 설사 못된 길로 가겠느냐는 근심 섞인 우려를 말한 이는 없었다. 그것은 민무구란 위인의 덕의 향기 때문이었다.
민무구가 신학문에 대한 조사를 해올 필요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청나라로 건너간 게 거의 보름이나 되었다. 평소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른 탓에 서른 명 남짓의 학생들은 평소처럼 자기 학문을 연마하는 데 열심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정원(庭園)으로 알려진 공자식 교수법이었다.
공자가 자신의 아들을 정원에서 만났을 때 잠시 물어보는 것으로 그쳤다는 교육 방법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묻는 이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교수법이었다. 이것을 제삼자인 외래에서 온 스승에게 물은 게 아니라 학생들 간에 묻고 거기에서 답안을 찾아냈다.
민대감의 둘째아들이 자신의 대화상대로 택한 건 윤씨 성을 쓰는 태현(泰賢)이었다. 아마도 그의 부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붙여놓았으리라. 그런데 문제의 회문시 공방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석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은 오전 학습 뿐이어서 일찍 끝난 터라 민대감의 둘째 아들과 정태현은 가까운 주루에 들러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풍류객처럼 술상을 준비시켰다. 그곳에서 민지운은 자기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보게 태현이, 내가 요즘 마음 걱정이 있는데 이걸 들어줄 사람이 없어 자넬 이리 청했네. 내년이면 이팔의 열여섯이니 우리를 젓비린네 나는 어린 것이라 말할 사람은 없겠지. 더구나 자네와 난 체신이 다른 사람 못지않게 장대하지 않은가. 그런데 말일세···."
차마 말을 못하겠다는 것인지 말끝이 흐렸다. 정태현은 그 역시 한 잔 술을 털어넣고 채근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는가? 할 얘기가 있으면 해보시게."
[주]
∎회문시(回文詩) ; 글자를 뒤집어도 뜻이 통하는 시
∎향초(香燭) ; 향기로운 초. 초의 용도는 두 가지로 상대를 잠재우거나 흥분시키는 용도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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