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인의 집에 손님이 찾아들었다. 본래 직업은 방물장수였는데 최근엔 홀로 된 여인을 은밀히 중신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집을 찾아온 사람 구경을 하는 지라 김여인은 '왜가리 매파'로 통하는 방물장수 아낙에게 자신의 신세를 하소연했다.
"자네라도 찾아오니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누먼."
"어찌 그러십니까?"
"이게 세상사는 것인지 어떤 건지 알 수 없네. 서방님은 반병신이 돼 아침부터 소리소리 고함만 지르고 시어머닌 걸신들린듯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으니 한 많은 이 세상 속시원히 떠나고 싶네."
"아이구 아씨 그런 게 아닙니다요. 살아있는 사람은 사는 날까지 살아야지요. 그러지 말고 아씨, 내가 사는 방법을 하나 가져올까요?"
"사는 방법이라니?"
"아씨, 이리 사나 저리 사나 사는 건 마찬가지유. 그러니 내가 방법을 마련해 올 때까지 아무 말씀 마시고 기다리시우."
방물장수 아낙은 어디서 뭘 하는지 이레 동안 잠잠 하더니 여드렛째 되는 날 정오가 지나 나타나 은근하게 목소릴 깔았다.
"아씨는 인물이 반반하니 눈 딱 감고 치마 한 번 올려요. 그 사람도 서방님 같은 이씨인 이종수(李宗洙). 서른셋에 상처를 해 혼자 사는 몸이라 내가 넌지시 운을 뗐더니 후꾼 몸이 달아 애걸복걸합디다. 이참에 아씨가 맘에 들게 해주면 내가 좋은 일 하나 만들어주겠수."
"···."
왜가리 매파가 내놓은 쌀 닷 되가 든 보퉁이를 받아 챙기고 김여인은 이날 새가슴이 되어 따라 나섰다. 큰길을 돌아나가 두어 식경 가다보니 약속 장소로 보이는 어느 집 앞에 이르러 낮은 어조로 소곤거렸다.
"바로 이 집이우. 아씨께서 문밖에 다가가 낮게 기침하면 방안의 불이 꺼질거유. 그러면 된 거유. 가만 가만 들어가 사내 품에 안기면 되우. 이런 말 하긴 그렇긴 한데, 아씨도 오랜만에 남자냄세 맡는 것 같겠수."
그날 김여인은 남자의 무한한 힘을 느끼고 몇 번이나 정신을 놓을 뻔했다. 이 사내는 남편과는 전연 달랐다. 연약한 남편의 신경질적인 응석받이와는 달리 거친 호흡이 얼크러져 황소같은 몸놀림을 느끼게 했다. 해시(亥時) 어림에 시작한 놀이는 인시(寅時)가 되어서도 그칠 줄 몰랐다. 아씨 역시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온 뜨겁고 묵직한 게 서둘러 나가지 않기를 바랬는데 그것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사내는 지치지 않는 용력으로 닭이 두 번이나 울 때까지 몸놀림을 그치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야···해요."
그 말을 겨우 하고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사내는 한 식경 쯤 방아를 찧고 나서 푸우 푸 단숨을 몰아쉬며 힘차게 알을 까고 배에서 내려왔다. 잠시 사이가 지나 사내가 호흡을 추슬렀다.
"언제 오겠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이녁을 세 번 만나고 싶다했소. 그래서 쌀 서른 가마를 줬는데 이녁한텐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소."
"···…"
"이녁은 얼마나 받았소?"
"닷되요."
"예에?"
사내는 어이가 없는 지 허공을 향해 한숨을 푹 쉬며 입맛을 쓰게 다셨다. 상대가 말도 안 된 대우를 받자 자신의 처지도 묘하게 된 것이다.
"이녁도 손해났으니 나도 한 번은 양보를 하겠네. 어떤가?"
김여인이 사내 쪽에 얼굴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문갑 안에서 쥘부채 하나를 꺼내들었다.
"내가 이녁에게 쥘부채 하나를 주겠네. 이 부채는 비익조(比翼鳥)라는 새가 그려진 운우선(雲雨扇)이네. 이녁이 보다시피 이 새는 각기 반 토막씩 그려져 있으니 하늘을 날아오르려면 두 마리가 합해져야 가능하네. 어느 땐가 그 부채를 들고 찾아갈 것이니 나를 받아주게. 나는 결코 이녁을 괴롭힐 생각이 없네."
날이 훤히 밝아오는 참이라 싫고 말고가 없어 허드렛 약속일지라도 그러겠노라 끄덕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왜가리 매파는 연락이 없었고 사내도 다른 행동이 없었다. 남편은 욕창까지 등에 번져 이레를 고생하다 세상을 떴고, 시어머니는 이웃집에서 가져온 찰떡을 며느리 오기 전에 꿀꺽 삼키다 기도가 막혀 세상을 떴다.
이제 세상천지에 홀홀단신이라 생각했는데 하늘도 무심치 않아 뱃속에 생명체가 꿈틀거렸다. 열 달 배앓이를 하여 세상에 태어난 건 사내아이였다. 아이의 이름이 묘했다. 동호(東呼)였다. 이동호. 글자대로 풀이하면 '동쪽에서 이씨가 불러서 낳은 아이'란 뜻이다.
이 녀석은 어쩌면 하는 짓이 제 에비와 그리도 닮았는지 책을 읽는 것보다 모이기만 하면 한담이나 주절거려 과시에 대한 싹수는 없어 보였다. 나이 열 셋에 박씨 집안의 규수를 데려와 혼례란 걸 치러주었다.
"얘야, 너도 혼례를 치렀으니 어른이다. 과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으니 시험을 쳐야질 않느냐?"
"그럼요, 쳐야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들은 틈만 나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기생방을 들락거리거나 협잡꾼같은 사내들과 어울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술을 마시다 하루나 이틀쯤 돌아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사대문 안에 자릴 잡았다는 보진제(寶眞齊)라는 한약방의 이주부(李主簿)가 찾아왔다. 나이가 마흔은 넘어 보였는데 워낙 기골이 훤칠한 데다 미목이 수려해 서른이 약간 넘을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이주부는 이 곳 저 곳 김여인의 아픈 부위에 침을 꽂고 여담을 풀어대더니 주머니에서 자인서(自認書)를 내놓았다. 그것은 이동호가 쓴 현금차용증같은 것이었다.
"이댁 아드님이 소인을 찾아와 차용해간 금액이 백 냥이 넘어 진즉 마님을 찾아오려 했습니다만 한 달만 기다려 달라기에 지금에야 왔습니다. 들리는 소문엔 서방님이 나이는 어려도 맺고 끊음이 있다 여겼는데 지금껏 아무 소식이 없으니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서방님은 다방골에서 기생들과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서방님이 이런 저런 일로 가져가신 돈이 백 냥이 더 되니 어쩌시겠습니까? 마님께서 지불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관에 발고해 쟁송(爭訟)을 일으킬까요?"
"그거야 자네 마음대로 할 일이나 나 같으면 그 아이가 집에 돌아오길 기다린 다음 찾아오겠네. 허나, 한 가지 물을 게 있네. 우리 집 아이가 뭣 때문에 자네에게 그토록 많은 빚을 졌는가?"
"도련님과 이놈의 인연은 사연이 짧지 않습니다. 저 역시 학문보다 도박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피 끓는 스무 살 나이엔 오갈 곳이 없게 됐습니다."
이주부의 얘길 듣다보니 떠오른 게 있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이 글을 잘 읽었다고는 하나 자신이 보는 앞에선 <사서삼경> 한귀절 읽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러던 남편이 어느 비오는 날 오후 넋두리처럼 흘려놓은 얘기가 있었다.
"이보게 임자, 자넨 우리 이씨 문중이 행세께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이지 실은 껍질만 요란한 것이네. 나 역시 장안을 휩쓸며 이것 저곳 잡상스런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네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건 나 자신을 속인 것이지 뭔가."
남편 이강구는 그런 얘기 끝에 뭔가를 주머니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것은 평범한 주사위였으나 남편의 얘기를 듣는 순간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나와 어울리던 왈자들은 부잣집 사내들을 도박판에 끌어들이는데 나를 앞세워 이용했었소. 이걸 보시오. 이 주사위는 오로지 짝수로만 숫자가 채워져 있소."
과연 그 주사위는 2·4·6이 두 벌로 된 이상한 형태였다. 남편은 껄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지난 일을 끄집어냈다. 자신이 집으로 오기 전 주사위 도박으로 단 한 번 큰돈을 땄다고 했다. 백미 2백 섬에 해당하는 돈이었는데 상대는 젊은 놈이었다고 했다. 조금만 남겨달라는 상대의 청을 거절하고 기생집으로 달려간 게 화근이었다. 넘칠 듯 전대를 채웠던 어음과 동전이 하룻밤을 새고 나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날 술청에서 난리를 치다 부랑배에게 뭇매를 맞고 반송장이 돼 달구지에 실려 왔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김여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주부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집안을 쑥밭으로 만든 건 주사위였어요. 짝수로만 된 주사위를 던져 난장판에서 날 속인 그 자가 나중에 크게 화를 입었다는 데,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세상 이치는 돌고 도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러나 마님, 지금 마님의 몸은 화(火)가 극도로 차올라 약발이 받질 않습니다.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시고 좋은 생각만 하십시오."
이주부는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뒷수쇄를 조심스럽게 채웠다.
"지난 일이지만 시생에게도 비밀은 있답니다. 아마 십여년은 훨씬 더 되는 얘깁니다. 고향을 떠나 한양 땅에 들어와 하루밤 쉴 곳을 찾는데 이초시란 분이 급한 병으로 의원을 찾는다지 뭡니까. 그날 시생이 그 분의 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드릴 거라곤 쥘부채 뿐이라지 뭡니까. 어느 때인가 사연을 알게 되면 하늘이 돕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부채엔 자세한 사연은 쓰여 있질 않고 비익조(比翼鳥) 반쪽만 그려져 있으니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입니다."
김여인은 어디 한번 그 부채를 보자 하여 이주부가 내민 물건을 받아들고 감회에 젖었다. 한 동안 부채를 펼치다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가 봅니다. 감춰도 좋을 일이 이렇듯 나타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시집온 지 얼마 안 돼 하루 하루 생활하는 게 어려워 방물장수 아낙이 마련해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야만 시댁 어머님을 봉양할 수 있는 곡식을 얻을 수 있다 하여 두 눈 질끈 감고 치마끈을 푼 인연이 있습니다. 방물장수 아낙이 개미 눈물만큼 내놓고 재물을 들고 튀었지요. 이초시 그 분이 말하길 다음날 비익조가 그려진 부채를 들고 찾아가면 하룻밤 안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약조 했습니다만 다 지난 일이지요."
"마님의 병은 심화(心火)가 들끓으니 하루아침에 나을 건 아닙니다. 내일은 초저녁부터 이 황촉을 켜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이주부는 오동통하게 생긴 누런 초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여인은 해가 떨어지자 윗켠에 황촉을 켜고 보료위에 누웠다. 자신이 이곳 이씨 일문에 시집 와 알게 모르게 치마끈을 푼 게 몇 번인가를 마음속으로 헤아렸다.
비가 몹시 내리는 어느 날 밤, 방물장수 아낙이 찾아들었다. 미움보다 반가움이 왈칵 일어났다.
"자넨 어디에 머무는가?"
"마님, 시생의 처지가 궁핍해 지난 날 마님께 불손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오늘은 죗값을 치르려 들렸습니다. 마님이 어찌 처신하든 쇤네는 서운해 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일은 그만 두게. 한데, 무슨 일인가?"
"사실은 얼마 전 이초시 그 양반을 만났습니다. 마님과 인연을 만든 뒤 무슨 일인지 시름시름 앓더니 지금은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그 양반 능히 여든 섬 지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물려줄 사람이 없으니 만사휴의 아닙니까. 오가다 말을 들으니 어떤 사람이 이 댁 서방님이 이초시와 닮았다는 소문이 있는 데다 '동쪽에서 불렀다'는 이 댁 서방님 이름이 자꾸만 이초시 어른의 마음자락을 움직이더랍니다. 쇤네도 서방님 얼굴을 유심히 보았더니 그런 느낌이 다분했습니다. 마님, 서방님이 그 분의 피를 받았지요?"
아항, 요것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났지만 이씨는 시치미를 뚝 떼고 능청을 떨었다.
"그거야 집안 비밀이니 함부로 발설 하겠는가."
"마님, 쇤네가 어제 그 분을 뵙고 약조를 얻었지 뭡니까. 만약 서방님이 그 분의 피를 받았다면 평생 모은 재물을 서방님께 드린다 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면 이 집안도 하루아침에 펴는 게 아니겠습니까."
"글쎄···."
"이초시 말은 마님을 직접 만나 자신과의 인연으로 자식이 생겼는지를 직접 묻고 싶어 합니다. 그 분의 짐작이 맞는다면 그날로 모든 문서를 줄 것이며 자신이 죽은 날을 기점으로 제사만 지내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님, 이번 일이 이뤄지면 쇤네에게도 한 밑천 떼어 주겠지요?"
"떼어주다 말다!"
일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초시는 오랜 중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 달 한가위가 지나 눈을 감았고,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삼개나루에 물이 불어 제방 길을 걷다 발을 헛디딘 방물장수 아낙의 주검이 떠올랐다. 사건은 목격자가 없는 데다 날씨가 사나워 실족으로 처리하는 데 이상이 없었으나 왜가리 매파의 속곳에서 나온 백미 서른 가마에 해당하는 이종수(李宗洙)의 어음이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주]
∎해시(亥時) ; 저녁 11경
∎인시(寅時) ; 새벽 5시경
∎운우선(雲雨扇) ; 남녀가 사랑을 약속한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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