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쥐에게 돌아가면 호랑이로 변한다

[역사소설 민회빈강30] 세자빈 사사의 마지막 수순

등록 2010.05.16 11:05수정 2010.05.1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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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인조의 집무공간이다 ⓒ 이정근


알면서도 물어보는 노련한 용인술. 그는 사람다루는 데 귀재였다

"부제학은 학문을 한 선비이므로 고사(故事)를 많이 알 것이다. 순(舜)은 상(象)을 죽이지 않았는데 주공(周公)은 관숙과 채숙을 죽였다. 왜 그랬는가?"


"이 일에 대해서는 옛사람이 이미 도출한 결론이 있으므로 신이 감히 별도의 의견을 제시할 입장도 아닐 뿐더러 능력도 없습니다."

이기조가 겸손한 마음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순이 상(象)을 죽이지 않은 것은 후환이 없기 때문이었고 주공이 관숙과 채숙을 죽인 것은 후환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묘께서 연산의 어머니를 죽인 것 또한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옛날 성인이 후환을 가장 염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김자점이 주억거렸다.


"오늘의 일이 무슨 옳지 못한 점이 있기에 이처럼 쟁집한단 말인가. 이런 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대신들이 적발해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경여 외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임금의 언성이 높아졌다.


"성상의 말소리와 기세가 너무 엄하십니다. 임금의 말씀은 이와 같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기조가 직언했다.

이경여 이외의 희생물을 찾아라

"이경여는 멀리 외딴섬에 있고 최명길은 병들어 틀어박혀 있으며 김류는 밖에 있으니 어찌 주장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김자점이 진화에 나섰다. 이 때 이경여는 젊은 간관들을 선동하는 우두머리로 찍혀 진도에 유배 되어 있었다.

"어찌 관직이 있는 자만 주장하겠는가? 비록 관직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뒤에 숨어서 주장할 것이다."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김상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모두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홍무적은 참으로 간사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혼조(昏朝)에서 소를 올려 항변하였고 근년에 와서도 과감히 말하기에 나는 그에게 취할 점이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지금에 이르러 보니 옛날에 그가 한 말은 간사한 꾀임이 드러났다. 홍무적은 강씨의 신하가 아닌데도 '신을 죽여야만 강빈을 죽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법전을 상고해 보면 강씨가 살아남을 리가 없는데도 논의가 이와 같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이행원이 직접 이 하교를 들었으니 어찌 정계(停啓)하지 않겠습니까."

김자점이 새로 임명된 대사헌 이행원을 끌어들였다. 자신이 추천해서 사헌부의 수장이 되었으니 값을 하라는 것이다.

"조정 신하들이 내 말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니 내 몹시 부끄럽다."

"승지와 사관이 모두 여러 차례 입시하여 직접 하교를 들었으니 그 실상을 알 것입니다."

"진실로 사변이 있다면 비록 대장이 입직한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는 입직하지 말라.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맡길 것이다."

푸념이다. 군사를 이끌고 궁 안에 들어와 있던 병조판서 구인후는 꿈쩍하지 않았다.

"서남과 소북에 대한 이야기가 성상의 하교에서 나오니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민망한 듯 김자점이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얘기하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허나, 인조가 서남과 소북을 거론한 데는 김자점을 주구로 활용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지 20여 년이 되었으나 일찍이 동인·서인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었는데 오늘 처음 이 말을 하게 되었다. 옛말에 '권력이 신하에게로 돌아가니 쥐새끼가 호랑이로 변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쥐는 잡아야 합니다."
김자점이 나섰다.

"어떻게 잡으면 좋겠는가?"
"덫을 놓아 잡아야 합니다."
"쥐를 잡는 데에는 덫도 아깝다. 때려잡아야 한다."

임금이 소리 하고 신하가 추임새를 넣고 있다. 장단도 멋들어진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강빈을 사사하려는 자신의 폭정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쥐새끼에 비유하고 있다. 누가 쥐고 누가 호랑이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권력이 쥐에게 돌아가면 호랑이로 변한다

광해군 시절. 능양군은 한낱 임금의 신하에 불과했다. 전쟁방지를 위해 배명친금 정책을 펼치던 광해를 반정으로 몰아 내고 권좌에 오른 그가 호랑이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 모두가 다 아는 공개된 비밀이었다. 스스로도 겸연쩍었을까?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척하던 인조가 말을 이어갔다.

"김시번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소인이다. 장부가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의 소견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 반성해 보아 옳다고 여겨지면 비록 천만 사람이 비난하더라도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그의 아비 김신국이 모를 리가 없을 것 같은데 그 자식의 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김자점이 김신국을 끌어들였다. 인조가 서남을 거론하며 원하던 바다.

"아비가 어찌 자식이 하는 바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김신국을 파직하라."
"분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김류는 원훈수상으로 어찌 이와 같이 일을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은 시비는 따지지 않고 한갓 들뜬 의논에 동요된 자이다."
"망극하옵니다."

임금이 김류를 질타하는데 김자점이 머리를 조아렸다.

"빈청(賓廳)에서 전하의 분부를 받고 신이 '호조판서 민성휘와 공조판서 이시백에게 강씨를 처치해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더니 '대신과 의사가 같다'하였습니다. 또 이조판서 남이웅에게 물었더니 '이것은 대신이 처치하는 데 달려 있다'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육경의 뜻이 이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대신이 분부를 받은 뒤에 물러가서 뒷말을 한 자가 이경석과 최명길 두 사람이나 되는데 육경 가운데도 어찌 다른 마음을 가진 자가 없다는 것을 보장하겠는가?"

합당한 답변을 찾지 못한 김자점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이행원이 이기조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전하께서 노여움이 심하니 강씨의 논의를 정계(停啓)하는 게 어떻습니까?"
"상이 이처럼 노여워하고 있으니 장차 무슨 말로 연이어 계사를 올리겠는가."
"이 논의에 대해 어찌 감히 연이어 계사를 올리겠는가?"

이행원 곁에 엎드려 있던 병조참판 허계가 끼어들었다.

"정언 기만헌, 헌납 채충원이 까닭 없이 계사에 빠지고 있으니 규피(規避)한 듯합니다. 체차하소서. 장령 박일성도 이와 같으니 체직해야 합니다."

김자점이 청했다.

"체직이 무어냐? 파직하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홍무적은 자신을 알아주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역적을 비호하고 구제하려고 하였으니 정의로 귀양 보내고, 심노는 강씨를 위해 충성을 다하여 합계 하려는 생각을 가졌으니 남해로 귀양 보내라.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린 이경여의 죄는 멀리 귀양 보내는 것으로 부족하니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하라."

강빈을 사사하기 위한 정지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덧붙이는 글 | 혼조(昏朝)-광해 시대
빈청(賓廳)-임금과 대소신료들이 회의하는 회의실
규피(規避)-약삭빠르게 피함
위리안치(圍籬安置)-죄인의 거주지를 가시나무로 둘러싸는 것


덧붙이는 글 혼조(昏朝)-광해 시대
빈청(賓廳)-임금과 대소신료들이 회의하는 회의실
규피(規避)-약삭빠르게 피함
위리안치(圍籬安置)-죄인의 거주지를 가시나무로 둘러싸는 것
#인조 #강빈 #세자빈 #소현세자 #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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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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