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98) 오픈 파티

[우리 말에 마음쓰기 918] '여는 잔치'까지 아니어도 '개업식'까지 버린

등록 2010.05.24 13:50수정 2010.05.2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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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픈파티(open party), 개업식, 여는 잔치

 

.. 조촐한 오픈 파티를 한 건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6월 29일 저녁이었다 ..<윤성근-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매진,2009) 37쪽

 

"한 건"은 "한 때는"이나 "한 날은"으로 다듬고, "하루 종일(終日)"은 "하루 내내"로 다듬어 줍니다. "하루 종일" 같은 말투는 굳이 다듬지 않아도 된다고 할 만큼 사람들 입과 손에 익은 말투입니다만,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이며 우리 말글을 헤아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루 내내"라든지 "온 하루"라든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말투로 가다듬을 수 있어요.

 

 ┌ 오픈 파티 : x

 ├ open party : x

 ├ opening

 │  1. (사람 등이 지나가거나 할 수 있는) 구멍[틈]

 │  2. 시작[첫] 부분

 │  3. 개막식, 개통식, 개관식

 │  4. <여는[열게 되는] 행위, 과정을 나타냄>

 │  5. (사람을 쓸 수 있는) 빈자리[공석/결원]

 │  6. 좋은 기회

 │  7. (입고 벗기 쉽게 만들어 놓은 옷의) 트인 부분

 ├ 개업식(開業式) : 개업을 알리고 축하하기 위하여 하는 의식

 ├ 개소식(開所式) : 개소할 때 행하는 의식

 │

 ├ 조촐한 오픈 파티를 한 건

 │→ 조촐히 여는 잔치를 한 때는

 │→ 조촐히 개업식을 한 때는

 │→ 조촐히 잔치를 연 때는

 └ …

 

저는 지난 5월 1일부터 사진잔치를 하나 열고 있습니다. 남들은 하나같이 '전시회(展示會)'라 이야기하지만, 저는 '사진잔치'라는 이름을 지난 2000년부터 써 오고 있습니다. 사진으로 마련하는 잔치요, 사진을 나누는 잔치이며, 사진으로 이야기하고 즐기는 잔치이기 때문에 '사진잔치'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 사진잔치에 찾아오는 분들 가운데 '오프닝'을 언제 하느냐고 묻는 분이 제법 많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뻔히 우리 말글 돌보기임을 알 텐데 당신들 입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오프닝'이라는 말마디가 톡 하고 튀어나옵니다. 하기는. 병을 딸 때에 '병따개'를 찾지 않고 '오프너'만을 찾는 오늘날 우리 지식인들인데, 사진잔치를 여는 자리를 일컫는 말이라 한다면 '여는 자리' 아닌 '오프닝'이라는 말마디가 튀어나올밖에 없습니다.

 

이 보기글을 살펴봅니다. 보기글을 쓴 분은 가게를 하나 새로 열면서 '오픈 파티'를 벌인다고 말합니다. 이분은 전시회나 공연을 기리는 잔치가 아닌, 가게를 처음 여는 자리를 기리는 잔치를 베풉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자리에 사람들이 익히 쓰는 말마디는 '개업식'이나 '개소식'입니다. '개업'이든 '개소'이든 따지고 보면 모두 '여는' 일이기에 '여는 자리'나 '여는 잔치'이지만, 말 그대로 '여는'이라는 우리 말을 제대로 살려서 쓰는 지식인을 이 나라 이 땅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 매장에서 열린 오픈 파티에 동반 참석했다

 │

 │→ 매장에서 열린 개업식에 함께 왔다

 │→ 매장에서 열린 축하 잔치에 나란히 왔다

 │→ 매장에서 열린 첫 잔치에 둘이 함께 왔다

 └ …

 

다른 사람들은 '오픈 파티'라는 말마디를 얼마나 쓰는지 궁금합니다. 인터넷 찾기창에 네 글자를 넣고 죽 둘러봅니다. "매장에서 열린 오픈 파티에 동반 참석했다" 같은 글월이 보이는데, 이 글월은 '열린'과 '오픈'이라는 말이 겹치고, '동반'과 '참석'이라는 말이 겹칩니다. 어찌 보면 '오픈 파티를 개최했다'고 하지 않으니 반갑다 할 터이나, '여는 잔치를 열었다'고 적바림하면 어딘가 어설픕니다. '참석(參席)'이란 자리에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동반(同伴)'은 짝을 지어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함께'라는 말이 겹으로 쓰였는데,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은 이렇게 엉터리 말을 한 줄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분 또한 이 말이 어떻게 뒤엉켜 있는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파티산업교육원은 웨딩플래너, 파티플래너 등이" 하고 읊는 글월을 보고, "나이키 스포츠웨어 2010 축구 에너지 스페이스 오프닝 파티가 열렸다" 하고 읊는 글월을 보면 어질어질합니다. 우리들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일터에서나 '생일잔치'를 하지 않고 '생일파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아주 마땅하다는 듯이 '파티산업'을 말하겠구나 싶지만, '웨딩플래너'라든지 '파티플래너'라든지 하는 이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새로 나타나는 일자리란 이렇게 온갖 영어를 짜깁기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입는 옷이라면 '운동옷'이요, 끝말을 한자로 넣어 '운동복(-服)'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운동옷이나 운동복을 2010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다 팔거나 알리는 자리에서는 '스포츠웨어'라 내세워야 잘 팔리거나 번듯해 보이는 듯합니다. '축구 에너지 스페이스'라고 해 보았자 우리 말로 옮기면 딱히 깊은 뜻을 담은 말이 아닌데, 무슨 행사라든지 공연이라든지 하면서 붙이는 이름들은 하나같이 영어판입니다. 이런 마당이니 '개업식'이든 '축하 잔치'이든 쓰지 않고 '오픈 파티'라 할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 첫잔치 / 여는잔치 / 새터잔치 / 새잔치 / 축하잔치

 ├ 첫마당 / 여는마당 / 새터마당 / 새마당 / 축하마당

 └ …

 

낱말 하나만 번드레하게 꾸미거나 겉발라 놓기 때문에 나타나는 '오픈 파티'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리 넋과 삶이 온통 영어를 쓰는 미국에 가 닿아 있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오픈 파티'이구나 싶습니다. 삶과 문화와 넋과 얼과 배움과 지식이 모두 영어 쓰는 미국하고 맞닿아 있으니 누구나 으레 영어로 제 뜻을 밝히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미국바라기를 하고 영어바라기를 하는 사람들로서는 '오픈 파티'란 럭셔리한 말마디가 아닌 수수한 말마디로 여기리라 봅니다.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로 고치는 공무원한테는 버럭 성을 낼 줄은 알지만, 정작 스스로는 '오픈 파티'를 즐기면서 겉멋을 부리는 삶에 매여 있구나 싶습니다.

 

깨끗하며 고운 말을 쓰면 더없이 좋지만, 깨끗하며 고운 말만 써야 하는 우리 말 다듬기가 아닙니다. 참된 말을 살피고 착한 말을 보듬으며 바른 말을 사랑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자면 참된 삶을 살피고 착한 삶을 보듬으며 바른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참되고 착하며 바른 삶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자꾸 참되지 않고 착하지 않으며 바르지 않은 뒤틀린 말마디에 젖어들거나 물들거나 길들면서 나동그라지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5.24 13:50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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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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