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2) 밥하기

[우리 말에 마음쓰기 917] 삶읽기, 쓸돈, 사진찍기, 잔소리

등록 2010.05.22 12:57수정 2010.05.2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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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삶읽기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첫머리에 어머니가 '독후감 숙제'를 가끔 해 주었습니다. 그무렵 국민학생한테는 숙제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터라 홀로 모든 숙제를 다 해낼 수 없었습니다. 모든 과목에 걸쳐 숙제가 잔뜩 있었고, 숙제를 안 하면 날마다 새로운 숙제가 밀리고, 밀린 숙제만큼 교사한테 날마다 몽둥이찜질을 받거나 따귀를 맞거나 책걸상을 들고 골마루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에다 일기를 쓰고 관찰일기를 쓰고 폐품을 모으고 새마을청소를 해야 하는데, 다달이 무슨무슨 포스터에 표어에 반공독후감에 반공웅변에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놀기는커명 집일도 못 거들며 밤늦게까지 고되니, 보다 못한 어머니가 불쌍히 여겨 거들었습니다. 책을 읽은 뒤 느낌을 쓰라는 '독후감(讀後感)'인데, 말만 들어도 질리고 무서웠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몹시 바빠 책을 읽을 겨를이 없고 느낌글 적바림할 틈이 없습니다. 사랑스럽고 맑은 책읽기란 꿈 같은 노릇이요, 따사로우며 밝은 삶읽기란 바랄 수 없는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세상읽기 그림읽기 사진읽기 노래읽기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7. 쓸돈

 

사람들 누구나 '용돈'이라고 말하니 모두들 '용돈'이라고만 여기며 지냅니다. '용돈'이란 '用 + 돈'임을 뜯어서 읽거나 살필 줄 안다면 이 낱말을 쓸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우리 말로는 '쓸돈'이요, 이모저모 쓰일 데가 있는 돈을 가리키니 '쓸돈'일 뿐입니다.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한문을 배울 때에 '用돈'이라는 낱말이 몹시 엉터리요 이런 낱말은 더는 쓸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用돈' 아닌 '쓸돈'으로 쓰자니 퍽 힘들었습니다. '用돈'은 한 낱말이지만 '쓸돈'은 한 낱말로 여기지 않을 뿐더러, 글에 '쓸돈'으로 적바림하면 사람들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쓸 돈은 있니?"라든지 "쓸 돈이 다 떨어졌어요."라고 흔히들 이야기는 하지만 '쓸 돈'처럼 띄어서 적지, 이때에 한 낱말로 삼으며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써야 할 돈을 가리키는 자리에는 '쓸돈'으로 적어야 올바르고, 웬만한 자리에서는 그냥 '돈'이라고 하면 됩니다. "엄마 용돈 주셔요."가 아닌 "엄마 쓸돈 주셔요."이고, "엄마 돈 주셔요."입니다.

 

 

 8. 사진찍기

 

늦도록 칭얼거리며 놀고 새벽 일찍 일어나는 아이하고 살아가며 기운이 딸린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용케 밥을 냠냠짭짭 잘 먹고 새근새근 달게 잠든 모습을 보면서 이 같은 귀여운 삶자락을 보겠다고 아이를 키우는 셈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이 결대로 저 좋은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며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싶습니다. 하루 내내 옆지기랑 아이하고 지내면서 아이가 차츰차츰 크는 모습을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습니다. 따로 어디 꽃구경을 간다든지 봄나들이를 나서면서 어여쁜 모습을 억지로 꾸며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잔뜩 어질러진 방에서든 고단하게 골목마실을 하는 길모퉁이에서든 아이가 아이다운 결로 뛰고 놀고 엎어지고 잠들고 놀고 밥먹는 모습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옮깁니다. 우리 식구 사진찍기는 말 그대로 사진을 찍는 일 '사진찍기'입니다. '촬영(撮影)'이나 '출사(出寫)'인 적이 없습니다. 아이는 이제 저 스스로 책을 손에 쥐고는 '책읽기'를 하고, 많이 어설프지만 혼잣힘으로 '밥먹기'를 하겠다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립니다. 엊그제부터는 혼자 바지를 내리고 '오줌누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우리 아이는 무엇을 할까요.

 

 

 9. 잔소리

 

애 엄마가 몹시 아프니 애 아빠가 아이를 맡아 돌보는 나날이 길어집니다. 그런데 애 엄마가 몹시 아픈데 애 아빠는 애 엄마를 제대로 돌보아 주지 못합니다. 애 아빠 앞가림에다가 아이와 복닥이는 나날로 지쳐 떨어지는 탓입니다. 하루 내내 씨름을 하며 아이한테 잔소리만 퍼붓다가 곯아떨어진 몸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형과 나를 돌보고 아빠 시중을 들며 할아버지 똥오줌을 치우는 삶을 퍽 오래 보내셨는데 그토록 많은 일을 하며 그토록 힘겨우셨을 텐데 잔소리를 한 적은 아주 드물지 않았느냐고. 사람으로서 낼 소리란 잔소리가 아니라 큰소리일 텐데, 사람으로 나눌 사랑이란 잔사랑이 아니라 큰사랑일 텐데, 저 스스로 큰사람이 아닌 잔사람이다 보니, 아무래도 잔소리에 잔일에 잔놀이에 잔몸짓에 얽매이는구나 싶습니다. 그나마 잔사랑이나 잔믿음이라도 건사하느냐 하면 하염없이 부끄럽습니다. 잔솜씨조차 안 되는 잔재주로 잔글이나 끄적이면서 잔마음으로 잔값을 하고 있습니다. 차근차근 가다듬어 큰솜씨가 되고 큰마음과 큰뜻과 큰사랑과 큰믿음을 담아낼 큰글과 큰책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잔챙이요 잔목숨입니다.

 

 

 10. 밥하기

 

날마다 배고픔을 채우는 밥하기를 합니다. 다른 무엇을 배운 적이 없고 하지를 않습니다. 흔히들 '요리(料理)'를 익힌다며 학원에 다닌다거나 책을 들추거나 하는데, 우리 옆지기 또한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책을 들추어 밥하기를 배울 적에도 요리를 배운다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일인 만큼 밥하기를 배운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우리 식구는 밥하기만을 합니다. 우리 두 사람에다가 아이가 함께 먹을 밥을 합니다. 요즈음 옆지기는 몸을 추스르고자 밥먹기를 끊고 있습니다. 밥상을 차려 밥먹기를 하는 사람은 애 아빠와 아기입니다. 밥먹기를 마치면 설거지를 하고, 설거지를 하면 한숨을 돌리면서 아이가 스스로 한동안 놀아 주기를 꿈꿉니다. 살짝 눈을 붙이거나 쉬고 싶어서. 그렇지만 아이로서는 엄마랑 아빠가 밥하기를 하면서 저랑 놀아 주지 않는다고 여기거나, 설거지를 하며 보내는 겨를에도 이리 들쑤시고 저리 쑤석거립니다. 생각해 보면, 아니 자리를 바꾸어 생각하면, 제가 아이라 할 때에도 함께 놀아 주기를 바라지, 엄마나 아빠가 저 좋을 때로 따로 논다면 서운하거나 짜증스럽거나 싫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5.22 12:57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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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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