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60)

[우리 말에 마음쓰기 916] '여성이라는 존재', '노예와 같은 존재' 다듬기

등록 2010.05.17 14:34수정 2010.05.1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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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여성이라는 존재

.. 남성들이 주로 '기획'하고 '공연'하는 분쟁 지역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늘 극도로 수동적인 피해자이거나 전쟁의 객체로만 존재해 왔고, 또 그렇게 묘사되어 온 게 사실이다 ..  <이유경-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인물과사상사,2007) 198쪽


"남성들이 주(主)로"는 "남성들이 거의 다"나 "거의 남성들로만 이루어져"나 "남성들이 으레"로 다듬어 봅니다. "'기획(企劃)'하고 '공연(公演)'하는"은 "'꾀'하고 '보여'주는"이나 "'생각해' 내고 '선사'하는"으로 손보고, "분쟁(紛爭) 지역(地域)에서"는 "다툼이 있는 곳에서"로 손봅니다. "극도(極度)로 수동적(受動的)인 피해자(被害者)이거나"는 "그저 끌려다니는 피해자이거나"나 "그예 끌려다니기만 하며 피를 보는 사람이거나"로 손질하고, "전쟁의 객체(客體)로만"은 "전쟁에서 손님으로만"이나 "전쟁에서 구경꾼으로만"으로 손질하며, "묘사(描寫)되어 온 게 사실(事實)이다"는 "그렇게 그려져 왔다"나 "어김없이 그렇게 보여져 왔다"로 손질해 줍니다.

 ┌ 여성이라는 존재는
 │
 │→ 여성이라는 사람은
 │→ 여성이라는 이름은
 │→ 여성이라는 자리는
 │→ 여성은
 └ …

우리 삶터에서 여성이 사람다운 자리에 선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면서도 느끼는데, 남자가 자전거를 타는 일은 아무렇지 않게 느끼고, 아니 아주 마땅한 듯 느끼면서도 여자가 자전거를 탈 때에는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꽤 있기도 합니다. 남자는 길거리에서 버젓이 담배를 태울 수 있어도 여자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태우면 안 된다고 여기듯(그러나 저는 남자 또한 길거리에서 담배 태우는 일을 몹시 싫어합니다), 여자가 택시나 짐차를 모는 일도 아직까지 낯설다고 여기는 우리 삶터입니다.

여자도 사람이기에 술을 잔뜩 퍼붓고는 비틀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여자도 사람이기에 옷에 김치국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여자도 사람이기에 코를 드르렁 골 수 있고, 여자도 사람이기에 다리를 벌리고 걸상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자가 휘어잡고 있는 누리에서 여자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여자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누리에서 여자와 마찬가지로 힘이 여린 목숨들은 제 목숨값대로 사랑스레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어린이도, 장애인도, 가방끈 짧은 이도, 못생긴 이도, 가난한 이도, 똑같은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삶터라 한다면, 이 삶터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놀이나 일답거나 놀이답게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부푼 꿈을 부푼 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허튼 생각 따위로 여길 뿐입니다. 너른 마음밭을 너른 마음밭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덧없는 생각 따위로 내칠 뿐입니다.

겉모습과 겉차림을 높이기 때문에 속모습과 속차림이 어떻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겉치레와 겉꾸밈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속치레와 속꾸밈이 알뜰하다 하여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겉발림과 겉껍데기에 눈길이 사로잡히기 때문에 속나눔과 속알맹이를 꾸밈없이 느끼지 못합니다.

 ┌ 객체로만 존재해 왔고
 │
 │→ 구경꾼으로만 있어 왔고
 │→ 구경꾼이기만 했고
 │→ 손님으로만 머물러 왔고
 │→ 손님이기만 했고
 │→ 바깥에만 맴돌아 왔고
 │→ 바깥에만 있어 왔고
 └ …

삶터가 삶터다울 때 삶이 삶답습니다. 삶이 삶다울 때 우리 생각이 생각다우며, 이러는 동안 비로소 말이 말답습니다. 글은 글답습니다.

말만 잘 가꾼다고 하여 잘 가꿀 수 있지 않습니다. 생각과 삶과 사람과 삶터 모두 잘 가꾸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가 사람다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데 말이 말다이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세상 절반인 여자가 사람다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얼거리라면 다른 절반인 남자 또한 사람다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셈이며, 글이 글다이 받아들여질 일이란 없습니다.

말과 삶은 한동아리이고, 말과 삶터는 떼놓을 수 없습니다. 말과 사람은 한 흐름이요, 말과 사람살이는 늘 잇닿아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내가 펼치는 말이 되고, 내가 바라보는 대로 내가 쓰는 글이 됩니다.

ㄴ. 노예와 같은 존재

.. 그녀는 주인집 남자가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나가던 공장 식당에서 일하던 '노예'와 같은 존재였을 뿐이었고, 아내가 친정에 다녀올 동안에 순간적인 충동으로 범해도 되는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  <이효인-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하늘아래,2002) 78쪽

'그녀'는 '그 여자'로 다듬고, "가르치기 위(爲)해"는 "가르치려고"나 "가르쳐 주려고"로 다듬습니다. '식당(食堂)'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밥집'으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순간적(瞬間的)인 충동(衝動)으로 범(犯)해도"는 "갑작스런 충동으로 건드려도"나 "남몰래 불쑥 건드려도"나 "슬쩍 건드려도"로 손질하면 어떠할까 싶고, '대상(對象)'은 '사람'이나 '노리개'나 '장난감'으로 손질해 줍니다.

 ┌ 노예와 같은 존재였을 뿐이었고
 │
 │→ 노예와 같았을 뿐이었고
 │→ 노예와 다름없을 뿐이었고
 │→ 노예와 같은 사람일 뿐이었고
 │→ 노예와 같은 목숨일 뿐이었고
 └ …

이 보기글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앞쪽에서는 "노예와 같은 존재"라 적고, 뒤쪽에서는 "범해도 되는 대상"이라 적습니다. 앞쪽은 '존재'이고 뒤쪽은 '대상'입니다. 그나마 뒤쪽은 '존재'라고 안 적었는데, '존재'로 적으나 '대상'으로 적으나, 사람을 '사람'이라고 가리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범해도 되는 대상이었을 뿐
 │
 │→ 건드려도 되는 사람이었을 뿐
 │→ 건드려도 되는 하녀였을 뿐
 │→ 건드려도 되는 노리개였을 뿐
 │→ 건드려도 되는 장난감이었을 뿐
 └ …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데, '존재'이든 '대상'이든 쓰고 싶으면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말마디로만 내 생각과 뜻을 나타내야 한다고 여기면, 이렇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말을 가다듬으려는 매무새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새롭고 새삼스러운 말투와 말결과 말씨를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있을 때 생각이 움직이고, 마음이 있어야 말이 살아납니다. 마음이 없을 때 생각은 고이며, 마음이 없고 말면 말 또한 죽은 채 머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존재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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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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