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이 뚫린 것도 모른 병판이 개선장군처럼 말하다니요"

[역사소설 민회빈강36] 역사는 반복 되는가?

등록 2010.06.03 00:57수정 2010.06.0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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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 창덕궁 정청 편액 ⓒ 이정근


조정을 장악한 김자점이 딴죽을 거는 반대세력을 제압하리라는 기대심리가 작용한 인조는 대소신료와 삼성 장관을 빈청으로 불러들였다.

"강씨가 아이를 낳아 궐 밖으로 내보냈다면 이는 국가의 중차대한 일입니다. 이를 어찌 내옥에서 다룬단 말씀입니까? 국청으로 다스리소서."
대사헌이 포문을 열었다.


"궁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내사옥에서 다스려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인조가 선을 그었다. 내명부의 일이라고 평가절하 하지만 궁녀를 다루면 세자빈이 나오고 강빈이 연루된 사건을 백일하에 드러내면 정당성이 빛을 잃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신의 도덕성에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사건을 굳이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 인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또한, 이것은 애첩 소의 조씨와의 약속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김자점이 재빠르게 치고 나왔다.

"왕손이라 하더라도 죄인의 아들이면 죄인입니다. 이러한 왕손이 궐밖에 생존해 있다면 이는 국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추적하여 잡아들여야 합니다."
구인후가 앞서 나갔다. 인구에 회자되는 좌인후 우자점이라는 말이 헛된 소문만은 아니었다.

"동궁전 나인들이 형신을 이기지 못하고 줄줄이 죽어 나가면서도 자복한 자가 한 사람도 없고 물증도 없지를 않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왕손이 궐밖에 살아 있으니 잡아들이자고 한 것은 본말이 전도 된 것입니다. 우선 보자기에 싸여 나간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하고, 만일 사람이 나갔다면 살아서 나간 것인지, 죽어 나갔는지를 확인한 연후에 추적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대사간이 논리정연하게 구인후를 통박했다.


"틀림없을 것입니다."

"것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이다."
구인후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왕심을 거스리는 폭탄 발언

"중차대한 문제를 논하면서 예단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살아있는 왕손을 내보내지 않고 사산한 아기를 궐 밖으로 내보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세자빈의 심정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폭탄발언이 터졌다. 이는 왕심(王心)을 거스리는 발칙한 언(言)이다. 인조가 '죄인을 비호한 자를 묶어라'고 명을 내리면 그 순간부터 죄인이 되는 위험한 어(語)다. 여기에서 언(言)은 주는 말이고 어(語)는 받는 말이다. 인조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세자빈이라 하셨습니까?"
잔뜩 벼르고 있던 구인후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강씨는 죄를 얻은 죄인입니다. 어찌 죄인을 세자빈이라 부른단 말입니까?"
잔뜩 고양된 구인후가 눈을 부릅뜨고 대사간을 노려보았다.

"아직 폐위하지 않았으니 세자빈이라 불러야 신하의 도리라는 것을 몰라서 묻는 것입니까?"

병조판서 구인후와 대사간 사이에 진검승부가 벌어졌다. 패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신하들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인조는 세자빈을 후원 별당에 유폐할 때, 폐위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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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후묘 인조반정 현장에는 없었으나 정사공신 2등에 책록 되며 인조 정권에 출사하여 포도대장, 어영대장,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는 사후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388년이 흐른 현재 초라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오늘날 변별들의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이 388년이 흐르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까? 궁금해진다. ⓒ 이정근


"내사옥에서 조사하고 있는 궁녀들을 의금부에서 다룬다는 것은 품위를 낮추는 일입니다."
팽팽한 일합에서 예리한 칼날에 상처를 입은 구인후가 화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병판이 웬 품위씩이나 거론하십니까?"
대사간이 병조판서 구인후를 쳐다보았다. 마주보는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구인후가 상기된 얼굴로 대사간을 쏘아보았다.

"전하를 모신 어전이라 말씀을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 나왔으니 하겠습니다. 병판이 궐내에 입직하면서도 하찮은 궁녀 하나가 궁성을 무시로 드나드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역도가 전하를 위해하기 위하여 잠입하기라도 했으면 어찌할 뻔 했습니까? 조선팔도에서 가장 무예가 출중한 군사를 이끌고 궐내에 진을 치고 있던 병판은 뭐했으며 대궐을 숙위하는 도총부는 뭐하는 군사고 도성을 지키는 훈련도감은 뭐하는 군대냐는 말씀입니다."

대사간이 병조판서 구인후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도총부가 대궐을 숙위하고 훈련도감이 도성을 경비하는 상황에서도 인조는 불안했다. 믿을 것은 인척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병조판서에게 별도의 군사를 이끌고 궐내에 입직하라 명했다. 병조판서 구인후는 구사맹의 손자다. 자신의 어머니 인헌왕후는 구사맹의 딸이다. 따라서 구인후는 사적으로 인조의 외종형이다.

"숙고해야할 병판이 무슨 전공이라도 세운 장군처럼 발언하는 것은 지엄한 어전을 능멸하는 것이고 사대부로서 온당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병판은 석고대죄 해야 할 것입니다."
대사헌이 가세했다.

부러우면 지고, 화내면 진다

"책임을 통감하고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구인후가 꼬리를 내렸다. 

"사직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소인배나 할 짓입니다."
대사간이 공세를 이어나갔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구인후가 발끈했다. 부러우면 지고, 화내면 진다고 했던가. 구인후가 흥분하고 있었다.

"지나치다니요? 내가 병판이라면 자결했던가 목숨이 모질어 죽지 못했다면 내 스스로 왕옥에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일국의 병조판서가 도성이 뚫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백성들이 어찌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대사간 채유후가 마침표를 찍었다.

"내, 친히 국청으로 다스리겠다."

가장 신임하는 구인후가 궁지에 몰리자 인조가 한발 물러섰다.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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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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