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린 우리 말투 찾기 (44) 그녀 11

[우리 말에 마음쓰기 929] '그녀' 아닌 '그 아이/암탉/문필가'로 적어야

등록 2010.06.15 12:05수정 2010.06.1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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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그녀 → 시내 / 그 아이

.. "난 옛날부터 시내를 위해서라면 몇 배의 힘이 나오더라구." "그래? 그렇다면 시합 전에 확실하게 정해 놓는 게 어때?" "무얼?" "이 시합에서 패한 쪽이 그녀를 깨끗하게 단념하는 것." ..  <아다치 미츠루/김명승 옮김-슬로우 스탭 (6)>(삼희,1993) 37쪽


'위(爲)해서라면'은 '생각해서라면'이나 '지킬 수 있으면'으로 손보고, "몇 배(倍)의 힘이"는 "몇 갑절씩 힘이"나 "힘이 몇 갑절씩"으로 손봅니다. "시합(試合) 전(前)에"는 "겨루기 앞서"로 다듬고, '패(敗)한'은 '진'으로 다듬으며, "단념(斷念)하는 것"은 "잊기"나 "털기"로 다듬어 줍니다.

 ┌ 그녀를 깨끗하게 단념하는 것
 │
 │→ 시내를 깨끗하게 잊기
 │→ 그 아이한테 깨끗하게 손털기
 └ …

일본 만화를 한국말로 옮길 때 으레 '被女'라는 대목을 '그녀'로 옮기곤 합니다. 일본사람은 '피녀'라는 새 낱말을 지어내며 알뜰살뜰 쓴다고 할 수 있을 테고, 우리도 이런 일본말을 받아들여 새롭고 알차게 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워낙 널리 뿌리내리며 퍼졌기에 무어라 따질 이야기란 없습니다. 다만, 우리한테 '피녀' 한 마디가 없다면 우리 느낌과 생각을 담아낼 수 없는지 궁금하고, 우리는 이런 바깥말이 아니고서는 우리 삶과 문화를 보여줄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그 아이'나 '그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예부터 이런 말을 익히 써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우리 삶하고는 걸맞지 않다고 느끼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삶은 우리답게 추스르는 삶이 아니라 영어를 앞세운 서양 물질문명 삶이니까요. 집도 옷도 밥도 서양집 서양옷 서양밥입니다. 하물며 말이나 글이 서양말이나 서양글이 안 될 리 없고, 일본에서 '피녀'라는 낱말을 만든 까닭도 서양말 'she'를 말할 때 받는 느낌을 남달리 나타내고픈 마음이었다고 하기에,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두루 쓰일밖에 없는 '그녀'가 아닌가 싶습니다.

ㄴ. 그녀 → 암탉


.. 그래서 난 열다섯 마리의 암탉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날 도와 달라고 애원했지. 밤낮으로 그녀들을 다스리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고 설명했지만 ..  <리지아 누네스/길우경 옮김-노랑 가방>(민음사,1991) 45쪽

"열다섯 마리의 암탉"은 "암탉 열다섯 마리"나 "열다섯 마리나 되는 암탉"으로 다듬습니다. '애원(哀願)했지'는 '빌었지'로 손보고, '설명(說明)했지만'은 '말했지만'이나 '이야기했지만'으로 손봅니다.


 ┌ 열다섯 마리의 암탉들
 └ 그녀들을 다스리는 일

아쉽게도 '열다섯 마리의'처럼 적으며 토씨 '-의'가 들러붙지만, 보기글 앞쪽에서는 '암탉들'이라고 알맞게 적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들'이라고 얄궂게 적고 맙니다. 우리는 암탉한테도 '그녀'라는 대이름씨를 붙여 주어야 하는가 봅니다. 암캐한테도 '그녀'라 하고, 암코양이한테도 '그녀'라 해야 하는가 봅니다.

범이든 여우이든 늑대이든 오소리이든 멧돼지이든, 암컷은 암컷입니다. 수컷은 또 수컷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매한가지입니다. 푸나무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물에 사는 고기들도 똑같으며 하늘을 나는 새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암이기에 암이고, 수이기에 수입니다.

먼 옛날 유리임금이 불렀다는 꾀꼬리 노래에 "암수 서로 살갑구나" 하고 나옵니다. '암꾀꼬리'가 '암꾀꼬리' 아닌 '그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집고양이도 암코양이이고, 길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 또한 암코양이입니다. 암컷이면 그예 암컷이지 '그녀'가 되지는 않습니다.

ㄷ. 그녀 → 요네하라 마리/문필가

.. '요네하라 마리 컬렉션'에 한 권을 더 추가하게 됐다. '프라하 생활'이나 '통역사 생활'에 더하여 이번에는 이 재치 넘치고 다정다감한 문필가가 자신의 '식생활'을 다루었다 … 하지만 그녀가 튼튼한 위를 지닌 '냠냠공주'이기도 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  <요네하라 마리/이현진 옮김-미식견문록>(마음산책,2009) 책 뒷겉장, 추천글

이 자리에 쓰인 '컬렉션(collection)'은 '목록(目錄)'으로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그런데, "요네하라 마리 목록"이란 다름아닌 "요네하라 마리 책"이거나 "요네하라 마리 책들"이에요. 말 그대로 '책'이나 '책들'로 적으면 됩니다.

'추가(追加)하게'는 '넣게'나 '얹게'나 '들이게'나 '들여놓게'나 '꽂게'나 '보태게'로 손보고, '생활(生活)'은 '삶'으로 손봅니다. '다정다감(多情多感)한'은 '따스한'이나 '살가운'이나 '따스하고 푸진'이나 '따스하며 촉촉한'으로 손질하고, "자신(自身)의 식생활(食生活)을"은 "무엇을 먹으며 살아가는지를"이나 "어떤 먹을거리를 즐기며 사는지를"이나 "어떤 밥거리를 좋아하는지를"로 손질합니다. '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나'로 고치고, "튼튼한 위를 지닌"은 "위가 튼튼한"이나 "밥통이 튼튼한"으로 고쳐 봅니다. "-이기도 했다는 건"은 "-이기도 했음은"으로 다듬어 줍니다.

 ┌ 그녀가 냠냠공주이기도 했다는 (x)
 │
 ├ 요네하라 마리 컬렉션
 └ 다정다감한 문필가

'요네하라 마리'라고 하는 '문필가'는 수많은 먹을거리를 알뜰히 즐긴다고 합니다. 이 보기글을 쓰신 분은 '요네하라 마리'라는 사람을 놓고 '문필가'라고 일컬었다가 '그녀'라고 다시 일컫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여러 가지로 썼구나 싶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요네하라 마리'라고 적는다고 해서 잘못될 일이란 없습니다. 따로 '문필가(文筆家)'라고 밝히지 않더라도 이 보기글에서 '요네하라 마리라는 사람은 글을 써서 책을 내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이 보기글이 적힌 책을 읽는 사람은 '요네하라 마리 = 글 쓰는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필가'란 무엇일까요. 아니, '문필가'라고 하는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 '필자(筆者)'는 우리가 쓸 만한 낱말이 아니라 '글쓴이'나 '지은이'로 고쳐써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문필가'라는 한자말에도 똑같이 '筆'이라는 한자가 깃들고, '者'만 '家'로 바뀌어 있습니다. 우리가 '필자' 아닌 '글쓴이'나 '지은이'라는 우리 말을 올바르게 찾아서 써야 한다면 '문필가'라는 낱말 또한 말끔히 털어낼 노릇입니다. 글흐름을 살피며 '글쟁이'라 가리켜도 되고, '글꾼'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잘 어울립니다. 사진을 찍으니 사진쟁이이고, 그림을 그려 그림쟁이이며, 일을 하기에 일꾼이고, 살림을 하기에 살림꾼입니다. 우리는 우리 말마디로 '-쟁이'와 '-꾼'을 붙일 때에는 맞은편이나 스스로를 깎아내리거나 낮춘다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맞은편을 바라보며 꾸밈없이 나를 드러내는 우리 말마디 '-쟁이'이며 '-꾼'임을 헤아릴 노릇입니다.

 ┌ 이이가 냠냠공주이기도 했다는 (o)
 │
 ├ 요네하라 마리 책들
 └ 따스한 글쟁이 / 살가운 글꾼

우리들이 두루 쓰는 말을 낮추어 보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요, 스스로뿐 아니라 이웃과 동무 모두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애써 추켜세우거나 떠받들어야 할 까닭이란 없으나, 괜히 낮추거나 깎아내릴 까닭 또한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이웃과 동무하고 즐거이 나누는 말 그대로 책을 쓰든 소설을 쓰든 논문을 쓰든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살붙이하고 날마다 마주하면서 나누는 말 그대로 신문글을 쓰고 느낌글을 쓰며 편지글을 쓰면 됩니다.

겉치레 말이 아닌 속차림 말이 되도록 마음을 쏟을 노릇입니다. 겉치레 삶이 아닌 속차림 삶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일 노릇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말익히기 #글다듬기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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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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