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56회)

삼인행 <2>

등록 2010.07.16 10:40수정 2010.07.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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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녀를 목안 깊숙이 찔렀으나 독물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나이다."

몽둥이로 구타당하거나 날붙이에 의한 외상이 없고 목을 매단 흔적이나 벌레 물린 자국이 없으니 이는 타물상해에 해당됐으나 주검 가까이에서 흉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선지 정약용은 발견된 자리에 주검을 하루 동안 놓아두었다.


소향이의 주검이 발견된 곳은 지금의 청와대가 위치한 북악산 줄기다. 북악은 산세가 대순같이 치솟아 충천목성에 속하는 명산으로 한양 도성의 주룡이다. 고려 숙종 때인 1102년 남경에 이궁을 오덕구의 길지로 알려진 곳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천도할 때 '고려 숙종 때 이룩한 궁궐터는 너무 좁아 남쪽의 넓은 터가 주변 산들이 이 곳을 향해 절하고 있는 명당'이라 했을 정도다.

사체가 발견된 삼운각은 경농재라 하여 임금이 손수 밭을 갈며 친경의식을 행했던 곳으로 조선 팔도의 지형을 본 따 논밭이 만들어져 이 일대를 팔도배미라 불렀다. 한양 천도 후엔 경복궁 북쪽에 자리한 신무문 밖이 됐는데 나중에 후원으로 조성되자 왼쪽에 융문당과 융무당이 동서로 자리 잡았다. 융문당은 대과를 치르던 곳이고 융무당은 어전에서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이 일대는 고려의 이궁 터였다. 소향이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단출했다. 물건을 넣어두는 반닫이 위로 요와 이불을 얹고 간단한 노리개 몇 개가 앉은뱅이 경대 앞에 놓여 있었다. 이 곳 저 곳을 뒤적이던 서과가 반닫이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나으리, 이건 먹다 남은 탕약 두 첩과 가느다란 팔찝니다. 이 방을 같이 쓴 최나인에 의하면 소향인 한 달에 두어 번 밖에 나갔다 왔는데, 지난달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서점에 들러 의서를 빌려왔답니다. 그것들을 사필하는 걸 유일한 낙으로 생각했는데 두어 주일 전부터 기색이 심상치 않아 무슨 일이 있는가를 물었으나 별거 아니라고 해 관심을 두지 않았답니다."

소향이 궁을 나섰을 때 갔음직한 장소를 서과에게 수소문 하게 한 후 자신은 서점에 들러 <금궤요략>이란 의약서를 둘러봤다. 이 책은 중원에서 들어올 때의 원형이 아니었고 조선 땅에서 가필과 첨삭된 것으로 미약에 관한 앞부분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었다.


방술의 첫째로 꼽는 비방에 요초방(瑤草方)이란 게 있었다. 항목은 <전등야화>였는데, 은유적인 의미가 다분하여 그 뜻은 가위로 등불을 갈라낸다는 의미였다. 가위는 사내의 결단을, 등은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켰다.

<역경>의 음양도에 '음이 앞서는 건 매우 불길하다'고 했는데 여인네들은 싫든 좋든 인내하는 걸 미덕으로 여겼다. 왕실에선 함부로 희락을 얼굴에 그려내면 엄벌에 처했고 어쩌다 인연을 맺은 여도사들 역시 함부로 즐거움을 펼치지 않았다. 본 항목에 모습을 드러낸 '요초방'은 미약의 처방으로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삼황은 복희 · 황제 · 신농을 뜻한다. 때론 황제 헌원씨 대신 여와, 축융, 수인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복희는 역의 팔괘를 만들어 인사의 길흉을 점 쳤으며 글자를 발명하고 그물을 짜 물고기나 새 잡는 방법과 여와를 아내로 받아들여 혼인하는 법을 정했다. 전해지는 신농의 모습은 사람 몸에 소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로 보아 농업의 신임을 알 수 있다. 염제 신농은 태양의 신으로 빛과 열로 오곡을 익게 하는 법을 가르쳐 식생활에 크게 공헌했으며, 그는 의약의 신이기도 했다. 이러한 신농에게 세 딸이 있었다. 세 딸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는데, 한 명은 '신농의 소녀'란 이름으로 설화에 등장한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이 소녀는 아버지 밑에서 비를 다스리다 훗날 수련을 쌓아 신선이 된 적송자의 뒤를 따라 여선인이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여와였다. 나이 어린 그녀는 어느 날 동해로 목욕하러 갔다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그녀의 영혼은 요정으로 환생해 발구산 위에 살면서 자신의 생명을 빼앗은 동해에 보복하려 날마다 서쪽 산에서 자갈과 나뭇잎을 가져다 바다를 메우려 기회를 노렸다. 나머지 한 명의 딸이 요희다. 요희는 여와처럼 아름답고 정열적인 소녀였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다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그녀는 죽은 후 사내가 그리워 고요산 허리에 노란 꽃을 피웠다. 열매를 맺은 요초가 그녀의 화신이다. 누구든지 그 꽃의 열매를 따 먹으면 이성을 찾아 방사를 해야 한다. 그녀는 강렬한 미약이 되었다.>

'그러니까 소향이는 요초란 미약에 관심이 있었다는 게 아닌가?'

의약서의 꼬리 부분엔 단약 만드는 방법과 그것을 복용할 때 주의점과 용도에 관해 씌어 있는 게 눈길을 끌었다.

다음날 아침 정약용은 궁인들 출입이 잦았다는 제중당을 찾아갔다. 수표교 옆에 자리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은 사대부가의 기침깨나 하는 이들이 남편과 자식의 건강을 위해 자주 찾다 보니 손님들이 머무는 객방엔 입담이 걸진 사내가 손님들을 맞아 염담이 한창이었다.
턱밑에 고슴도치처럼 수염이 수북한 사내가 손등으로 수염을 쓸며 끊어졌던 얘길 이어나갔다.

"내가 예전에 풍설깨나 했지 않습니까. 한 번 들어보시겠소? 두텁바위골에 사는 김판서댁 며느리가 시집 온 지 다섯 달 만에 실성했는데 은밀히 사연을 알아봤더니 판서댁 아들이 워낙 주색을 밝혀 그런 사단이 벌어진 게요. 부산에 형님이 일을 보러 간 틈을 노려 제 형수를 덮쳤지 뭡니까. 평소 골골대는 남편보다 근력이 있어 뵈는 시동생을 품었으니 뜻은 이뤘지만 문제는 두 사람의 거시기가 궁합이 맞지 않아 빠지질 않은 거예요. 너무 놀란 형수는 자기만 살겠다고 머리맡에 놓아둔 장도로 사내 가슴팍을 찌르고 비명을 질렀지 뭡니까. 비명소리에 김판서와 부인이 달려와 보니 둘째 아들이 피 흘리며 거꾸러져 있는데 그곳이 제 형수의 배 위더라 그 말입니다. 의원을 불러 간신히 남녀를 분리해 냈는데 김판서에게 의원이 그런 말을 하더랍니다. 이것은 성교가 지나쳐 정기가 소모돼 양물이 오그라들지 않고 빳빳하여 집안 식구들이 알까봐 형수가 시동생을 죽인 거라구요."

쉰쯤 돼 보이는 초로의 사내가 빈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장안에 떠도는 소문처럼 도둑이 들어와 제 형수를 겁간하려는 걸 동생이 막다 죽었다는 그 일입니까? 시동생이 목숨을 잃자 형수도 흉한에게 덤벼들어 아까운 목숨 잃었다는 얘기지요?"

"그 일이 있고 시집 온 지 얼마 안 된 둘째 며느리가 실성했다지요?"
"그랬지요. 실성했습니다. 누구는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단번에 유명인사가 됐다는 말이 있는데, 둘째 며느린 자고 일어나니 과부가 돼 있더라 그 말입니다. 더구나 집안에 떠도는 얘긴 형수와 시동생이 야합해 난리가 일어났으니 세상에 그런 웃음거리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사내에게 달라붙어 여러 모양으로 물었지만 그것을  불편하게 생각 않고 얘길 달금지게 이어나가 풍설가답게 사연을 마무리 지었다.

"계집이 실성해 날뛴 건 한 가지 원인으로 사내 때문이었지요. 그 댁에선 우리같은 풍설가를 불러 놀이마당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돼지를 잡고 술을 준비한 뒤 힘깨나 쓰는 장정들도 불렀지요. 그들은 먹고 마시며 놀다 한 놈이 일을 치르면 다른 놈이 기다리고 있다 들어가길 몇 차례 하니 날이 훤히 샜지 뭐겠소. 김판서의 예측처럼 그리하고서야 며느리의 실성기가 돌아섰으니 세상 이치는 참으로 묘하지요. 아하하하하!"

정약용이 굳었던 낯을 쫙 펴며 풀기없이 웃었다. 한쪽 눈을 찡긋거리다가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내 풍설가에게 한 가지 의논할 게 있소이다."
"뭐요?"

풍설가는 거만스럽게 말하며 쥘부채를 쫘악 폈다.
"내가 늦장가 들어 삼 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마누라 거시기에 불을 떼지 못하고 있소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 물건이 부실해서 좋다 하는 약재는 다 써봤으나 개미 눈물 만큼도 효험을 못 봤으니 약단이란 게 말만 무성하지 믿을 바 없습디다."

"누가 그래요? 약이란 게 효험 없다면 의원이 어찌 필요 하겠소? 약은 제때 쓸 줄 알아야 효험을 봅니다. 아, 육불치란 말이 있잖소. 편작 선생이 고치지 못하는 여섯 가지 중 하나가 돈이 없어 제때 약을 쓰지 못한 거요. 약만 제때 쓴다면 이 세상에 못 고칠 병이 없지요."

"그럼 내가 헛소릴 한단 말씀이오? 마누라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까짓 돈이 문제요. 집안에 재물이 있으면 뭣합니까. 밤이 되면 마누라 무서워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아하하하, 사내라면 그렇겠지요. 허나 방법은 있습니다. 좋은 책을 손에 넣었지 뭡니까. 들리는 말엔 그게 한나라 때 어떤 명의가 썼다는 <금계요략>이란 의서예요. 그 책에 남녀의 고민을 깨끗이 해결할 미약 만드는 방법이 있더라니까요. 그 내용을 필사해 약을 만들었는데 효험이 이만 저만 아닙디다. 한 알을 삼켰는데 색에 주린 아귀처럼 날뛰었지 뭡니까. 이참에 대량으로 만들어 정승 · 판서 댁에 선전을 대대적으로 할 계획이오. 보아하니 궐자는 어느 댁 집사 쯤 되는 모양인데 어떠시오, 마음이 동하면 돈을 좀 만들어 오던지?"

"그런 방법이 있다면 당장 갔다오지요. 한 알에 얼마지요?"
"한 알? 아하 그렇게 안 팔아요. 보름치나 한 달 분을 먹어야 효험을 장담하지 고작 하룻밤 장난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따지겠다는 거요? 그래 좋소, 내가 한 알 그냥 드릴 테니 이걸 먹고 생각이 있으면 다시 오시오. 그때는 보름치 이상 구해야 합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 싶소이다. 내 돌아갔다 일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한데···, 이곳 제중당 이주부께선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 출타했습니까?"

"이런 사람하곤. 이의원이 있었다면 객담 푸는 내 곁에 사람이 모이겠소? 솔직히 말해 이의원 그 사람 신인이네. 의술이 그토록 신묘한 지 소스라치게 놀랐다니까. 지금 하원이란 기생집에서 중요한 손님을 만나고 있을 것이니 두어 시각 지나면 올 게요. 기다렸다 만나고 가던지?"

"아, 아닙니다. 궐자가 귀한 약을 줬으니 당장 시험해 봐야지요."
"그러게나, 아주 효험이 있을 것이야. 자네 마누라가 난리를 치면 그게 이 사람 덕이란 걸 잊지 말게. 아하하하하!"

풍설가 말처럼 제중당 이주부는 그 시각 금오위 이철형을 만나고 있었다. 왕실의 피가 먼 쪽에서 튀긴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 하나 꿰차지 못했지만 들리는 소문엔 그의 할머니가 궁에 있을 때 선대왕(영조)으로부터 승은을 입어 여러 곳에 땅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 귀퉁이를 떼어 팔았는데 그게 보통 사람들은 평생을 벌어도 만지지 못할 거액이었다. 자식이라곤 아들 하나 밖에 없는 집안에서 어떻게든 좋은 관직을 하나 받게 했는데 평생 글 읽는 것보다 방탕으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스물 셋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상태였다.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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