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찍은 사진이나 잘 쓴 글이란 없어요

[책이 있는 삶 143] 방송국 피디한테 들려주고픈 이야기

등록 2010.08.09 13:58수정 2010.08.0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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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을 거쳐서 방송국 피디 한 분이 전화를 걸어 온다. 내가 인천에서 해 왔던 사진책 도서관이나 인천 배다리라고 하는 헌책방거리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방송국 피디는 나한테 전화를 걸어 온 어제 낮, 바로 이튿날인 오늘 인천 배다리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찍자고 말한다. 이녁은 내가 인천에서 충주 산골마을로 살림집을 옮겼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그런데 나보고 산골마을에서 이튿날 곧장 인천으로 '날아와서' 방송으로 찍혀 달라고 말한다.

 

방송국 피디라고 하는 분한테 이런저런 요구와 부탁을 들으며 참으로 어이없다고 느끼지만, 아는 분한테서 전화번호를 받아 연락했기 때문에 어이없다는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한다. 이녁이 찍는다는 다큐멘터리 방송은 꽤 잘 찍는다 하고 줄거리도 괜찮다고들 그러지만, 텔레비전이 없을 뿐더러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우리 식구는 이녁이 찍는 방송이 어떠한 줄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서둘러 찍는 방송이 얼마나 볼 만할까? 사람들이 서둘러 쓰는 글이나 서둘러 찍는 사진이나 서둘러 그린 그림이나 서둘러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방송국에서 취재를 하자며 연락하던 때는 우리 식구가 겨우내 먹을 김장 무우와 배추를 심으려고 밭을 일구어 골을 만들던 무렵. 도시사람은 하기 좋게 전화로 얼추 연락하면서 이런저런 부탁을 하지만, 시골사람은 아무 때나 섣불리 전화를 받는다든지 무슨무슨 부탁에 따라 움직일 수 없다. 안 되는 부탁을 자꾸 되게 해 달라며 전화기를 붙잡고 있도록 한 까닭에, 한손에는 손전화를 들고 한손에는 괭이를 든 채 힘겨이 밭을 갈아 골을 만든다. 이제 그만 좀 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들고, 벼락치기로 찍으려는 방송이라면서 무슨 다큐멘터리 방송이라는 이름을 붙이나 싶은 생각이 뒤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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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텃밭이지만, 이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는 동안 전화가 와서 오래도록 한손으로 괭이질을 하며 골을 만들었습니다. ⓒ 최종규

조그마한 텃밭이지만, 이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는 동안 전화가 와서 오래도록 한손으로 괭이질을 하며 골을 만들었습니다. ⓒ 최종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 하는 일만 높이 여기고 시골에서 하는 일은 업수이 여기고 있는데, 산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이튿날 곧장 도시로 나와서 방송을 찍자고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움직이는 데 들일 찻삯에다가 갑작스레 움직여야 하는 만큼 우리는 하루뿐 아니라 여러 날을 길에서 버리고 힘들기 때문에 여러 날 일삯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방송국 피디라 하는 이는 우리한테 '당신이 바라는 대로 방송을 찍도록 우리보고 움직여 달라'는 말만 자꾸 되풀이할 노릇이 아니라, '출연료 얼마 찻삯 얼마 경비 얼마 …….'에다가 교통편은 어찌어찌 도와주고 같은 이야기를 함께 꺼내야 한다.

 

방송국 피디한테 전화번호를 알려준 분이 나중에 전화를 걸어 온다. 전화번호를 알려준 분은 먼저 당신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취재 부탁이 들어왔는데 해 보시겠느냐고 물어 보려 했단다. 이렇게 물어 보고 나서 방송국 피디가 전화하기로 했다는데, 방송국 피디는 이녁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불쑥 전화한 셈이다.

 

내 전화번호를 알려준 분한테 한 말씀 올린다. "그렇게 갑작스러이 부탁을 한다고 들어줄 수 있지 않지만, 그렇게 부탁을 하려면 적어도 하루를 빼고 우리 식구 움직이느라 이틀이 걸리니까(시골에서 도시로 나오려면 하루를 다 보내야 하고,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오려면 또 하루를 길에서 다 보내야 한다), 적어도 100만 원은 준다고 해야 그런 일을 하겠는데, 100만 원이 아닌 200만 원을 줘도 찍고픈 마음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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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방송국 피디들은, 또 취재기자들은 골목길을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있는 그대로 골목길을 담아내자면, 골목동네 사람들 결에 맞추고 다가서야 할 테지요. 벼락치기로 갑작스레 찾아가서 찍는다고 골목길 삶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 최종규

사람들은, 방송국 피디들은, 또 취재기자들은 골목길을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있는 그대로 골목길을 담아내자면, 골목동네 사람들 결에 맞추고 다가서야 할 테지요. 벼락치기로 갑작스레 찾아가서 찍는다고 골목길 삶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 최종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다움과 사람마음을 건사해야 비로소 책다운 책을 내고 글다운 글을 쓰며 사진다운 사진을 찍고 방송다운 방송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당신 방송 일정이 빠듯하고, 전화로 취재 부탁을 한 이튿날 바로 찍어야 할 만큼 바쁘다면 이 짧은 동안에 얼마나 알차고 아름다우며 알뜰하게 방송을 찍을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벼락치기 공부는 공부가 아니듯, 벼락치기 방송이란 방송이 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궁금하다. 나로서는 이제껏 벼락치기란 해 본 적이 없을 뿐더러, 벼락치기로 내 소담스럽고 사랑스러운 삶을 날려 버리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을 내 흐름과 물결을 살리면서 내 넋과 얼을 살찌우는 참되고 착하며 고운 길을 걸으며 신나고 야무지게 꾸리고 싶다.

 

아마, 그 다큐멘터리 방송을 찍는다면, 얼마 앞서 내놓은 내 책들인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하고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를 제법 알릴 수 있겠지. 제법 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책들을 널리 팔도록 하는 데에 꽤 이바지를 하겠지. 그러나, 나는 지난해 겨울날 내 책 <생각하는 글쓰기>(호미)를 내놓고 나서 '인간극장'이라고 하든가 어디였더라, 아무튼 퍽 사랑받는 어느 다큐멘터리 방송 제작자한테서 온 연락을 손사래쳤다.

 

보름쯤 우리 살림집에 붙어서 방송을 찍은 다음 다섯 차례인가 일곱 차례 잇달아 다큐멘터리로 내보내겠다고 하는데, 제아무리 잘 찍는 방송이라 할지라도 '산골아이 영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벼락치기로 내 책을 알리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책을 사람들이 인터넷책방에서 주문해서 사서 읽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 책을 사람들이 책방으로 느긋하게 마실을 가서 장만하여 차근차근 읽기를 바란다.

 

새책방에서 장만하든 헌책방에서 장만하든, 또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든, 부디 내 책을 읽을 사람들은 제발 다리품을 팔아 책방이나 도서관으로 찾아가서 몸소 이 책 저 책 뒤지다가 내 책까지 함께 살피면서 골라들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이라 할 까닭조차 없는데, 나는 내 책을 다리품을 팔면서 글과 사진을 일구어 내놓았지, 인터넷 검색이나 책상맡 머리굴리기로 이렁저렁 짜깁기해서 내놓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책을 내 몸품을 팔고 내 마음을 기울여 내 땀방울을 담아 내놓았지, 다른 이 책을 베끼거나 흉내내면서 내놓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책에 내 모든 사랑과 믿음을 실으면서 내놓았지, 내 이름값을 높인다든지 돈을 더 많이 번다든지 무슨 문단 권력을 얻고자 내놓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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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4월에 내놓은 <사진책과 함께 살기>, 2010년 6월에 내놓은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 책을 새로 내놓고 널리 알린다든지 방송 취재가 들어올 때에 받아들인다든지 하지 않아, 책을 애써 내놓아 준 출판사 분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차분하면서 올바로 다가오지 않는 곳하고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 최종규

지난 2010년 4월에 내놓은 <사진책과 함께 살기>, 2010년 6월에 내놓은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 책을 새로 내놓고 널리 알린다든지 방송 취재가 들어올 때에 받아들인다든지 하지 않아, 책을 애써 내놓아 준 출판사 분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차분하면서 올바로 다가오지 않는 곳하고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 최종규

 

방송국 일꾼이든 대학생 기자이든 자유로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든 매한가지이다. 당신들이 내 이야기와 내 삶을 촬영기에 살뜰히 담고 싶다면 당신들로서는 내 이야기를 오래도록 차근차근 살피고 들여다본 다음 나한테 찾아와야 한다. 당신들은 내 삶에 당신 삶을 맞추면서 내 삶이 어떠한 결인가를 돌아보며 내 빛깔을 골고루 담아야 한다.

 

새삼스러운 소리인데, 나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을 들여놓지 않은 지 어느덧 열여섯 해가 넘었다(열일곱 해 앞서는 고등학생이었고, 이때에는 우리 어버이하고 살았으니까, 집에 어쩔 수 없이 텔레비전이 있었다). 우리 식구는 텔레비전을 비롯해 세탁기와 냉장고와 청소기와 전자레인지 같은 제품을 쓰지 않는다. 구태여 이러한 전기제품을 쓸 일이 없다고 느끼는 한편, 우리 두 손과 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우리가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갈 때에 나 스스로 아름답고 즐거울 수 있음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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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11월과 12월에 잇달아 내놓은 내 책 두 가지. 책을 내놓기만 하고 홍보가 될 '취재 받아들이기'는 안 하고 있는 가운데, 인세 몫으로 책을 사들여 둘레에 선물만 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보기에 저 같은 글쟁이는 팔림새에 참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 최종규

지난 2009년 11월과 12월에 잇달아 내놓은 내 책 두 가지. 책을 내놓기만 하고 홍보가 될 '취재 받아들이기'는 안 하고 있는 가운데, 인세 몫으로 책을 사들여 둘레에 선물만 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보기에 저 같은 글쟁이는 팔림새에 참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 최종규

 

다시금 새삼스러운 소리를 한다면, 방송국 일꾼이 취재를 하는 흐름이랑 글쟁이가 글을 쓰는 흐름이랑 똑같다.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는 흐름이랑 그림쟁이가 그림을 그리는 흐름이랑 이 모두가 똑같다. 노래꾼이나 춤꾼이라고 다르지 않다. 모두 한동아리이다. 농사꾼과 교사와 노동자 모두 같다. 한 흐름이고 한 결이며 한 무늬이고 한 삶이다.

 

차근차근 되새기는 가운데 곰곰이 곱씹을 수 있어야 글다운 글 하나 얻는다. 글이란 '짓기'가 아닌 '쓰기'인데, 글쓰기란 '고마운 글 하나 얻기'이다. 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은 늘 느끼는 대목이다만, 사진쟁이 가운데에도 제법 많은 이들은 '잘 찍은 사진 한 장'에 매달리고 있다. 잘 찍은 사진이란 있을 수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글을 쓰는 사람은 뜻밖에 잘 못 느끼고 있으나, 사진쟁이 가운데에는 느끼는 사람이 제법 많은 대목, 바로 나 스스로 참 좋다고 느끼는 사진이란, 내가 잘 찍은 사진이기 앞서 '나한테 잘 찍혀 주어 고맙게 선물받은' 사진임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 스스로 참 좋다고 느끼는 글이란, 내가 잘 쓴 글이기 앞서 '나한테 좋은 글감이 잘 찾아와 주어 고맙게 써 내려간 선물 같은' 글이다.

 

우리가 즐겁게 보거나 기쁘게 받아들인 방송이라 할 때에는, '고마운 글 선물'과 '고마운 사진 선물'하고 똑같이 '고마운 방송 선물'이다. 방송국 일꾼이 제아무리 빼어난 솜씨꾼이라 할지라도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없다. 좋은 방송을 '찍을' 수조차 없다. 좋은 방송을 '얻을' 뿐이다. 방송국 일꾼은 당신들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낮추며 고개를 숙여야 한다. 오래도록 배워야 하고 더 많이 살펴야 하는 가운데 가만히 어루만지며 어깨동무할 마음이어야 한다. 선물받는 글쓰기요 그림그리기요 사진찍기요 노래부르기요 춤추기임을 모르거나 잊는다면, 이이는 거짓말쟁이이다. 선물받는 방송취재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이는 바보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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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헌책방을 조용히 오래도록 찾아가 보는 사람만 느낄 수 있습니다. 더욱이 다큐멘터리로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헌책방 이야기를 살피며 글과 사진으로 담는 사람' 삶을 찍겠다고 하면서 벼락치기 방송으로 다가서려 한다면 아무 이야기를 '건질' 수조차 없습니다. ⓒ 최종규

헌책방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헌책방을 조용히 오래도록 찾아가 보는 사람만 느낄 수 있습니다. 더욱이 다큐멘터리로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헌책방 이야기를 살피며 글과 사진으로 담는 사람' 삶을 찍겠다고 하면서 벼락치기 방송으로 다가서려 한다면 아무 이야기를 '건질' 수조차 없습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2010.08.09 13:58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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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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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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