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자를 받은 상감은 조아(朝衙)를 마치자 정순왕후가 머무는 대비전으로 올라갔다. 삼화루 벽에 <송낙>이란 그림이 붙은 걸 알고 있는 정순왕후였지만 상감의 갑작스런 출현에 태연히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주상."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주상이 곁을 돌보고 있으니 어려운 게 없지요. 그러잖아도 시중에 떠도는 얘기로 한 번 뵀으면 했는데 잘 오셨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주상도 들은 바 있을 것이오. <송낙(松絡)>이란 그림이 어쩌면 나를 그리도 닮았는지 중신들 의견이 분분하다지 않습니까. 게다가 내가 데리고 있는 상련(賞蓮)이란 아이가 한량들의 술 자리 놀이에 빠졌다는 것도 있고요."
"들은 바 있습니다. 도화서 화원 혜원 신윤복에게 풍속화 몇 점을 그려오라 했는데 그림은 가져오지 않고 무성한 소문만 장안에 깔리지 뭐겠습니까. '가야금을 들으며 연꽃을 구경한다'는 청금상련(聽琴賞蓮)대해, 어진(御眞)을 그리던 단원(檀園)이 심상치 않은 말을 했습니다."
상감은 이곳에 올 때 들고 왔던 두루마리 그림 하나를 펼쳐들었다. '청금상련'이었다. 또 다른 것은 <월하정인(月下情人)>이었고 다른 하나는 <송낙(松絡)>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세 그림만은 여인의 얼굴과 몸체의 선이 비슷했다.
"마마께선 이 그림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 그림 속 여인이 혹여 내가 아니냐 그 말입니까?"
"마마께 물은 건 그림을 어찌 생각하시느냐입니다."
"이 그림에 대해 말하기 전에 주상은 병신년(丙申年) 제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병신년이라면···."
"선대왕이 세상을 버린 지 스무 해가 되지 않았는 데도 눈만 감으면 어제 일인 양 시야를 막습니다."
"아, 예에."
"선대왕의 제례가 끝나면 무엇보다 내 마음에 남아있는 선대왕에 대한 그리움을 화폭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더니 소문은 믿을 수 없으니 직접 화원의 솜씨를 확인해 보라하여 내가 궁인들을 내 보냈습니다."
"아, 예에."
"청금상련이란 그림을 그릴 때엔, 혜원이란 화원을 직접 술 자리에 끌어들였는데 이것은 나중을 생각하여 그리한 게 아니고 풍속화에 있어 단원에 버금 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량들의 술자리 놀이인 그 그림은 눈에 거슬리는 바가 있습니다. 마마께선 <송낙>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내가 보림원에 간 건 사실입니다. 그곳의 무애 스님이 글을 쓰면 불력(佛力)이 대단하다 하여 찾아갔지요. 두어 차례 만난 인연이 있지만 근자엔 가지 않았는데 조바심치는 아낙네의 모습이 나를 닮았다는 말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보오, 주상. 이곳 대비전으로 주상이 온 것은 시중에 떠도는 그림 때문이 아니라 보오. 그렇지 않소?"
"그렇긴 합니다만 고약한 소문이 떠도는 건 막아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마마께서 모든 걸 부정하지 않으시고 세세하게 밝혀주시니 쓸데없이 터져나오는 풍설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마마께선 <미인도(美人圖)>에만 짬을 내신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혜원이 그린 <송낙>이란 그림은 마마의 위상이 깎일 수 있으니 화제(畵題)를 바꾸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난한 아낙이 멀리 떠난 남편의 소식을 조바심치며 기다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그림에 대해 다른 얘기가 나오는 건 차단시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비마마."
"예에, 말씀하세요."
"이번 일을 놓고 도화서에도 변화를 줄까 합니다. 임오년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묘역을 참배하려 수원에 나가는 정경을 그림으로 남기려 합니다. 화원들의 숫자도 늘릴 예정인데다 그림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을 풍속화에 뛰어난 인물로 대체할까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선은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화원들의 자질을 길러야 하는 쪽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일의 적임자는 단원 김홍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단원이 도화서에 돌아오면 그를 멀리한 예판은 어찌 할 건가요?"
"예판을 다른 자리로 보낼까 합니다. 이 점 마마께서도 알고 있어야 할 것으로 보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상께서 잘 하리라 보오."
일단 일은 이 즈음에서 끝을 맺었다. 상감은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 한 시름 놓았는데 사헌부에 있는 정약용은 뜻밖의 소식에 질겁했다. 삼화루에서 살인사건이 난 것이다. 그곳에 나가자 때마침 거기 있던 혜원이 상황을 설명한다.
"내가 이곳에서 만나려고 한 사람은 반촌에 사는 채직동입니다만 우연히 이곳에 왔다 윤별감을 만났습니다. 그 자는 별채 쪽에서 나왔는데 몹시 허둥댔습니다."
"자넨 윤별감을 아는가?"
"예전에 한 번 뵀습니다. 그 때는 홍의(紅衣)를 벗고 있었기에 누군지를 잘 몰랐습니다만, 오늘은 다른 일이 없어 단숨에 알아봤습니다."
"잘 아는 사이라?"
"예에. 지난 번 <청금상련>을 그릴 때 세 사람의 한량이 있었는데 술을 마시고 초야권을 치르기 위해 계집의 몸을 흥정할 때 윤별감이 만만치 않은 액수를 내놓았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긴, 상련이란 계집은 대비마마의 전각에 있는 궁인으로 온갖 시더분한 일을 하는 김가에게 상으로 내린 것이라 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윤가는 계집을 제 다리 위에 올리고 온갖 음탕한 짓을 해 술 자리에서도 김가에게 싫은 눈초릴 받았습니다."
"오호, 그래서 자네가 화제(畵題)에 흥미로운 글구를 남겼던가. 가만, 그렇게 보면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대비마마의 먼 친척이라는 김가와 윤별감이 청련이란 궁인으로 인해 서로 원망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때는 저도 잘 몰랐지만 오늘 보니 지난 일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엔 초야권을 치르려던 연정(戀情) 때문에 소란스럽다가 오늘 삼화루에서 두 사람이 술판을 벌인 것이구먼."
"그렇습니다. 왠지 일을 몹시 서두르는 것 같았으나 윤별감이 들고 있는 건 두루마리였습니다. 아마, 글씨나 그림이겠지요."
"반촌에 사는 채직동이 여기 있는 건 무슨 이윤가?"
"미로(迷路) 그림을 가져와 윤별감에게 줬다 합니다."
"다른 이유는?"
"그것 뿐이랍니다."
살인 현장을 돌아본 후 서과는 검시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방안엔 주안상이 있고 죽은 사내 앞엔 백자 잔에 술이 담겨 있는 반면 반대쪽 잔은 술기가 없습니다. 이로 보아···."
"죽은 자는 화가 나서 상대와 상관없이 술을 마신 게구먼."
"윤별감은 반촌에 사는 채직동과 약속이 있었는데 이곳 삼화루에서 김가와 혜원이 우연히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허면, 여자 때문에 상대를 죽인 건가?"
"한 번에 상대를 죽인 것으로 보면 칼 솜씨가 매서운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죽은 자는 피를 많이 흘린 것으로 보이진 않던데?"
"식기상(食氣顙)입니다."
"식기상?"
"예에."
"깊이는?"
"1촌5푼이 넘습니다."
이것은 1촌7푼에 육박한다는 말이다. 숨통 아랠 베고 죽은 경우는 단 한 번의 칼 흔적이 있다. 상흔의 깊이가 1촌 3푼이면 식계(食系)가 끊어지고 상흔의 깊이가 1촌5푼이면 식계가 끊어지고 기계(氣系)는 약간 손상된다. 그러나 1촌7푼이면 목을 벤 즉시 숨이 끊어진다.
사람에겐 인(咽)과 후(喉)가 있다. '후'는 앞에 있어 공기가 통하고 '인'은 뒤에 있어 음식물을 삼킨다. '후'는 하늘의 기운에 상응해 폐(肺)의 계통이 되고, 아래로는 폐경(肺經)에 닿아 호흡의 길이 된다. '인'은 땅의 기운에 응해 위(胃)의 계통이 되니 아래로 위장에 이어져 음식의 통로가 된다.
단숨에 목을 베 식기와 기계가 상했다는 건 상황이 매우 다급하다는 것인데 윤별감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약용은 급히 관병을 풀어 윤별감을 찾게 했으나 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주]
∎조아(朝衙) ; 조회
∎식기상(食氣顙) ; 목을 베어 사람을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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