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419)

― '예전의 모습', '예전의 것을 반복하는' 다듬기

등록 2010.09.25 14:57수정 2010.09.2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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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예전의 모습

 

.. 그곳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전거들이 줄지어 서 있던 예전의 모습은 낭만적이었다 ..  <자전거가 있는 풍경>(아침이슬,2007) 97쪽

 

'낭만적(浪漫的)'인 모습이라고 할 때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합니다. 그냥 "낭만적인 느낌"인가요? 보기 좋다든지, 사람 냄새가 난다든지, 살가움을 느낄 수 있다든지, 아름답다든지, 넉넉하거나 느긋해 보인다든지, 오순도순 수수하게 어울리는구나 싶다든지, 즐거운 모습이라든지, …….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 느낌을 담아낼 수 없기에 '낭만적'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지 궁금합니다. 이 낱말이 아니고는 자전거들이 줄지어 서 있던 모습이 어떤 느낌으로 내 가슴에 아로새겨졌는가를 나타낼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면서 슬픕니다.

 

 ┌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

 │→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 예전 모습이 사라졌다

 │→ 예전에 본 모습이 아니었다

 │→ 예전에 없던 모습이었다

 │→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 …

 

'예전'이라는 낱말 뒤에는 토씨 '-의'를 붙이지 않는 우리 말삶입니다. 아니, 토씨 '-의'를 붙일 일이 없습니다. '지난날'이나 '앞날'도 마찬가지이고, '예'로만 쓸 때에도 그렇습니다. "지난날 모습"이나 "앞날 모습"이지 "지난날의 모습"이나 "앞날의 모습"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난날의 모습"이나 "앞날의 모습"처럼 토씨 '-의'를 붙입니다. 알맞지 않은 말투를 펼치면서 알맞지 않은 줄 느끼지 않고, 올바르지 않게 글을 쓰면서 올바르지 않은 줄 깨닫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예전부터 써 온 말삶을 잘 돌보고 가꾸고 일구고 우리 뒷사람한테 즐거이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예전부터 나누어 온 사랑과 믿음을 잘 추스르고 보듬고 북돋아서 우리 아이들한테 살뜰히 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며 삶이며 넋이며 사랑이며 믿음이며 옳고 바르게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느 하나 맑고 싱그럽게 이어주지 못합니다. 아니, 이런 생각이 처음부터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앞사람한테서 고운 말과 삶을 물려받던 이음고리가 끊어졌다고 할까요. 어느 결엔가 우리 앞사람한테서 따순 사랑과 믿음을 이어받던 목숨줄이 사라졌다고 할까요.

 

말과 삶이 서로 동떨어지는 우리 터전이 됩니다. 글과 넋이 서로 엇나가는 우리 삶터가 됩니다. 뿌리가 뽑히는 말이요, 줄기가 꺾이는 글입니다. 바람 잘 날이 없는 말이며,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글입니다.

 

 ┌ 예전의 모습은 낭만적이었다

 │

 │→ 예전 모습은 아름다웠다

 │→ 예전 모습은 살갑고 좋았다

 │→ 예전에는 아름다웠다

 │→ 예전에는 살갑고 좋았다

 └ …

 

자전거가 아름답게 있던 예전 모습을 떠올리면서 오늘날은 자전거가 아름답게 있지 못한 모습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이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수수한 삶을 내버리면서 수수한 말 또한 내버립니다. 아기자기하고 서로 가난하게 어우러지면서 없으면 없는 대로 기쁘게 나누던 삶을 내동댕이쳤기에, 아기자기하면서 살가운 말 또한 내동댕이칩니다.

 

말이 말다울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아야 할 테고, 삶이 삶다울 수 있도록 제길을 찾도록 함께 힘을 쏟아야지 싶습니다. 넋이 넋다울 수 있도록 제구실을 헤아려야지 싶고, 얼이 얼다울 수 있게끔 제몫을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사람 구실을 하고 사람 몫을 하면서 나부터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람 자리를 찾고 사람 길을 걸으면서 우리 스스로 곱고 맑은 삶을 꾸려야겠습니다.

 

 

ㄴ. 예전의 것을 반복하는

 

.. 반면에 백만장자가 될 정도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후에도 그저 예전의 것을 반복하는 예술가도 많습니다 ..  <박태희 옮김-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안목,2009) 85쪽

 

'반면(反面)에'는 '그러나'나 '그렇지만'으로 다듬고, "될 정도(程度)로"는 "될 만큼"이나 "되도록"으로 다듬습니다. "부(富)와 명예(名譽)"는 그대로 두어도 되고, "돈과 이름"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후(後)'는 '뒤'나 '다음'으로 손질하며, '반복(反復)하는'은 '되풀이하는'이나 '따라하는'이나 '벗어나지 않는'으로 손질해 줍니다.

 

 ┌ 예전의 것을 반복하는

 │

 │→ 예전 것을 되풀이하는

 │→ 예전 사진을 되풀이하는

 │→ 예전대로 되풀이하는

 │→ 예전처럼 되풀이하는

 └ …

 

좋은 예전 모습을 오늘날까지 고이 잇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예전 모습을 고스란히 이어가는 일은 그릇되지 않습니다. 훌륭한 예전 모습을 오래도록 지키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고인 물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멈춘 물이 된다면 말이 다릅니다. 흐름을 잊은 물이 된다면 곰곰이 되씹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좋았던 예전 모습이라 할지라도 고여서는 안 됩니다. 늘 조금씩 가다듬고 북돋아야 합니다. 더없이 아름답던 예전 모습이라 하여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차근차근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으로 훌륭했던 예전 모습이라 하지만 흐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흐르고 흘로 내 자리를 뒷사람한테 물려주고, 흐르고 흐르며 아직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나 먼저 꿋꿋하고 씩씩하게 헤쳐나가야 합니다.

 

 ┌ 예전에 하던 대로만 하는

 ├ 예전에 찍던 사진만 찍는

 ├ 예전 사진에만 매여 있는

 ├ 예전 사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 …

 

좋은 자리이기 때문에 선선히 떠납니다. 좋은 자리이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만 머문 다음 뒷사람한테 자리를 내어줍니다. 좋은 자리인 까닭에 즐겁게 물러납니다. 좋은 자리인 만큼 누구나 이 자리를 즐길 수 있도록 늘 열어 놓으며 누구라도 한 자리에 매이지 않게끔 다독입니다.

 

좋은 일은 혼자서 하면 안 되고, 좋은 말은 혼자만 붙잡아서는 안 되며, 좋은 책은 혼자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좋다고 느낀다면 기꺼이 나누어야 합니다. 좋다고 여긴다면 넉넉히 펼쳐야 합니다. 억지로 시키는 짐덩어리가 아니라, 기쁘게 먼저 찾아와서 받아들이는 선물이 되도록 갈무리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와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9.25 14:57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와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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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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