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째 씨를 받아 심은 쭉정이 배추가 풀과 벌레들과 생존 경쟁을 벌여가며 잘 자라고 있다.
송성영
우리 밭에는 따로 갈아 놓은 배추 밭이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 우리나라 4대 종묘상을 먹어치운 다국적기업에서 받은 씨를 뿌린 밭입니다. 벌써 5대째 씨를 뿌리고 다시 씨를 받아 배추를 심고 있습니다. 속이 실하진 않지만, 아직까지 풀과 벌레들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가며 그럭저럭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5년간 재배를 통해 확인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이 종묘상에서 나온 배추 씨앗은 다음 대에 씨를 받아 심으면 쭉정이로 자랍니다. 기형 배추가 나옵니다. 참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토록 한해살이 씨앗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생명을 죄 뒤틀어 놓는 그 기술로 생명을 살리는 데 심혈을 기우였다면 세상은 벌써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하튼 저는 그 잔인무도한 다국적 기업에서 내놓은 배추 씨를 받아 매년 500포기 가까이 심어 왔습니다. 결과는 백전백패. 속 알갱이가 꽉 들어찬 통통한 배추를 건지기가 쉽지 않아 매년 김장 김치 담그는 데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이런 저를 아내는 늘 못 마땅해 했습니다.
"그걸 왜 자꾸 심어? 김장도 못 담는 걸.""기달려 보라구, 언젠가는 좋은 놈 나올껴."김장 김치도 담그지 못하는 배추 밭에 농약은 물론이고 화학비료조차 치지 않으며 온갖 정성 다 들여도 결국엔 농약에 절은 배추를 사다가 김장을 해왔으니, 아내의 불만은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결국 김장용 배추 모종 수소문에 나서다하여 작년부터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종묘상에서 판매하는 배추씨로 김장 김치용 모종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따로 모종을 키워 속 알갱이 찬 김장을 담그려 했는데 올해는 새 터 정착에 정신을 빼앗기고 거기다가 작은 도서관을 꾸미기 위해 장판이며 도배며 주변 정리를 하다 보니 그만 시기를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없는 살림에 비싼 배추를 사서 김장을 담글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시기가 늦었어도 김장 배추는 심어야 했습니다. 집에서 늘 세끼 밥을 챙겨 먹고 어쩌다가 두서너 달에 한번 꼴로 외식을 하는 주제이니, 김치 없이 어떻게 겨울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어렸을 때 하루 두세끼 겨우 먹고 살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도 김장 김치를 없이 겨울을 보낸 적은 없었습니다.
어쨌든 오일 장터를 기웃거려 가며 읍내에 나가 종묘상까지 들쑤시고 다녔는데도 배추 모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때가 늦은 것도 늦은 것이지만 배추 값 폭등으로 장에 모종이 나오자마자 금세 동이 났던 것 같습니다.
촘촘하게 뿌려 놓은 씨알머리 없는 배추라도 한 포기 한 포기 옮겨 심어 볼까 고민하던 차에 구원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 뒤편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어촌 계장 부부가 때마침 늦은 배추 모종을 옮겨 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림짐작으로 천 포기가 넘어 보였습니다.
"어촌 계장님, 거기시, 혹시 배추 모종 남게 되면 좀 파실 수 없을까요이.""아적 못 심으셨어요?""심긴 했는디, 그게 좀 속 알갱이가 차지 않는 배추라서….""다 심어 놓고 남게 되면 좀 드릴 게요." "아 당연하지요. 다 심고 남으시면 그래야쥬. 아이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