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11.10 14:43수정 2010.11.10 15:23
10월 24일(일)
남해안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졌다. 밤새 창 밖에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릴지 알 수 없다. 평일도 아닌 주말, 일요일에 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건 생각만 해도 처량하다. 남들이 보기엔 또 얼마나 애처로워 보일까?
오늘은 도양읍에서 머무르고, 내일 아침 다시 출발하기로 한다. 일단 달리기를 포기하고 나니까 마음은 편하다. 편히 쉬면서 그동안 못 다한 일들을 마저 다 해치울 생각이다. 이틀치 원고가 밀려 있다. 가능하면 오늘 작성을 끝내 놓아야 한다. 그동안 찍어 놓은 사진이 거의 포화 상태다. 컴퓨터 용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진이 아니면 모두 삭제를 해야 한다.
그런데 사진은 손도 못 대고 밀린 원고를 작성하는 데만 하루가 다 가버린다. 어느새 해가 지더니, 다시 어제 이곳에 도착했던 때와 똑같은 상황을 맞는다. 어떻게 된 게 자전거를 탈 때보다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다. 이런 상태로 편히 쉴 생각을 하다니 꿈도 야무지다. 편히 쉰 건지 빡세게 일한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자전거타기 좋은 날, 자전거 타기 좋은 길
10월 25일(월)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창 밖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강풍이 불고 있는 게 틀림없다.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느냐에 따라 오늘의 운이 결정된다. 긴장 반, 기대 반이다.
다행히 순풍이다. 오늘은 고흥반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바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쪽을 향해 불고 있다. 잘 하면 오늘 하루 종일 바람의 힘을 이용해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니 이런 행운도 다 생긴다.
지난밤 일기예보에 비가 오고 나서는 기온이 많이 떨어져 날씨가 추워질 거라고 했는데, 날씨도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하다. 행운이 겹친 셈이다. 이럴 땐 바람 방향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떠나야 한다. 세상에 바람처럼 변덕이 심한 게 없다. 못 믿을 게 바람이다. 행운이 언제 불운으로 바뀔지 모른다.
고흥반도에서는 대부분의 해안을 77번 국도가 지나간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국도라 갓길이 없는 구간이 많고, 도로 사정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방향 표시가 분명해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 꽤 쾌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연륙교로 연결이 되어 있는 지죽도에서부터 외나로도가 있는 구간까지는 모두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한 마디로 자전거타기 좋은 날, 자전거 타기 좋은 길을 만난 셈이다.
녹동항을 출발해 바로 국도로 올라선다. 한동안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진다. 해안을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나 똑같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간척지를 이용해 만든 논이 끝없이 펼쳐진다. 방조제라고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곳의 논과 방조제는 남다른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오마방조제에 숨은 나환자들의 아픔
오마방조제 제방 끝에서, 보기 드물게 커다란 안내판을 발견한다. 그 안내판에 초기 이 방조제를 만들 때의 아픈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다. 1962년, 군부가 정권을 잡은 직후다. 방조제를 건설하던 초기, 소록도에 수용 중이던 음성나환자들을 동원했다.
간척지가 만들어지면 그곳에 음성나환자들을 위한 정착촌을 만들어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나환자들에게 섬을 떠나 육지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방조제를 쌓는 데 나환자들이 큰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간척지에 나환자들을 정착시킨다는 사실이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작업은 중단됐고, 나환자들은 다시 소록도로 돌아갔다. 국가가 주도하는 건설 사업에 음성나환자들을 동원했던 역사도 그렇고, 나환자라는 이유로 평생 섬에 갇혀 살아야 했던 역사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당시엔 그런 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오마방조제 위에 서서 간척지를 수놓고 있는 누런 논을 내려다본다. 간척지에 소록도의 한과 눈물이 배어 있다. 이곳의 간척지에서 생산된 쌀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소록도가 뿌린 차가운 눈물이 따뜻한 밥알이 되어 매일 누군가의 밥상 위로 올라갔다. 소록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섬이 아니었다.
하동마을에서 지죽도 가는 길로 들어선다. 이곳에서부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이미 풍남항을 지나면서부터 해안 풍경이 남달라 보였다. 절벽 위 해안도로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절경이다. 그 풍경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접어들고 나서는 지죽도에서 방점을 찍는다.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