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97회)

목밀녀(木蜜女) <4>

등록 2010.12.21 09:59수정 2010.12.2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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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전은 사가에서 전해진 소식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포 일을 보던 대비전별감 나상욱이 간룡척을 확인하러 나갔다 목숨을 잃고 이번엔 망월사 비구니까지 불에 타 목숨을 버린 소식은 대비전을 뒤집어놓을 소식이었다. 다행히 정순왕후가 그 자리에 없었기에 불벼락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서감찰의 전언을 듣고 무수리 하나가 입을 열었다.

"대비마마께선 기우제를 준비중이십니다."


씨앗을 뿌리는 봄의 파종기엔 비 한두 방울 보이더니 사월 초파일이나 5월 단오, 유월 유두나 칠월 칠석이 가까워질 때까지 흰 구름만 띄운 하늘엔 바람만 살랑거렸다. 게다가 조정의 기류도 이상한 쪽으로 나아간다는 소문에 관상감에선 비방을 내놓았었다.

"대비마마, 전하께선 개혁을 서두르십니다. 사대부들이 치부의 근간으로 삼는 고리대금과 기방을 이용한 도박 등을 금지시키려 사헌부가 조사 중에 있으니 방법을 달리해 하늘의 뜻을 살피시옵소서."

"그게 무슨 소린가?"
"마마, 시파들은 개혁을 내세웁니다. 이제까지 사대부들이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건 양반들을 위한 법 때문입니다. 허나 전하께선 서얼을 중용하고 백성들을 위한 법을 만들어 집행하고 있으니 사대부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비까지 내리지 않으니 전하의 백성 다스리는 힘이 잘못됐다는 점에 조금씩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정순왕후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왕실이 편히 쉬도록 튼실한 가지와 풍성한 잎사귀를 제공한 게 누군가. 양반이라 부르는 사대부들이다. 그러다보니 4백년간을 내려온 기름진 땅엔 그들의 이름자가 꽂힐 수밖에 없었다.

'주상은 사도세자가 묻힌 수은묘를 수원의 천장지로 옮겼으니 더한 바람이 없다 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건 하루하루 달라지는 여러 법령이 그걸 말하지 않는가.'


부자들은 귀가 얇으나 자신만의 고집이 있다. 움켜쥔 재물에 대해 목을 내놓고 싸우려 든다. 하찮은 것이라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면 목숨을 내놓고 달려드는 게 조선의 양반입니다. 모든 일이 다 맞는 건 아니지만 관상감의 별제로 있는 이가 그런 말을 했지 않은가.

"대비마마, 세도의 불길이 거칠게 타오를 때는 조그만 실수도 묻힐 수 있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모든 게 전하의 수중에 들어가고 벽파의 중신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걸 빼앗기지 않으려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하오니 마마, 이젠 고리대금이나 도박 등으로 사소한 원한을 사지 마시고 큰일을 위해 벽파의 늙은 구렁이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머리가 개운해졌다. 선대왕이 가신 후 자신은 혼자 남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위에 사람이 있어도 관작을 얻기 위해 찾아올 뿐 그들이 시파쪽으로 옮겨붙을 마음이 있다 해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으니 기회를 보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오니 마마, 그자들에게 각기 엽전 백 냥을 내놓게 하고 미낄 던지십시오."
"미끼라니?"

"딸 가진 이에게는 녹두패(綠豆牌)를 주시고 장차 왕실에서 중히 쓰겠다 하시면 됩니다. 아들만 있는 자에겐 과시(科試)를 통해 관직에 오를 혜택을 준다 하시면 마마가 이끄시는 대로 따라 올 것이며, 자식 없는 자는 상권(商權)을 내비치시면 구리 냄새에 민감한 그들이 말없이 따라올 것입니다."

녹두패는 전하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다. 많고 많은 궁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든 계집을 만나면 명을 받는 내관이 녹두패를 들고 궁인의 방에 찾아가 '오늘밤 전하께서 당신을 점찍은 것'이란 상황을 전한다. 녹두패는 궁에 들어온 사대부가의 자식들이 전하를 뫼실 기회를 갖는 것이다.

"마마, 그 일을 하자면 마마곁에 늙은 구렁이들을 움직일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제갈량처럼 팔진도를 만들진 못해도 가뭄에 비를 부르는 천기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를 마마께서 가까이 두시면 머지않아 큰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큰 뜻이라···."
"그렇습니다. 소인이 천기를 보아 하니 이레 후에 비가 오겠습니다. 그 날을 기해 마마께선 기우제를 올리시며 비를 부르십시오. 이 일은 전하를 위해 마마께서 비를 부른 것이라 하십시오. 나중에 마마께서 간룡척(看龍尺)을 만드신 이율 물으시오면, 비가 오지 않아 수신(水神)인 용을 부르는 비방이었다 하시면 고갤 끄떡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가고 관상감에서 예시한 날이 가까워졌다. 정순왕후는 그동안 준비를 서둘렀다. 소격서를 통해 열 네 명의 무기(巫妓)를 가려뽑고 사대부가에 연통해 장차 왕실을 위해 일을 할 일곱 명의 소녀를 취택해 기우제 행사를 준비했다.

은밀하게 준비한 행사지만 사헌부에선 이 일을 벌써 알고 있었다. 장용위와 함께 조사한 서감찰은 대비전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정약용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으리, 대비전이 심상찮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경희궁 북쪽 훈련도감 분영에 군자정(君子亭)이 있사온데 그곳에 흙을 돋우는 것으로 보아 기우제를 준비하는 것이라 보옵니다. 이번 기우제는 여느 때완 달리 양반들의 여식과 소격서의 도학생도가 참여하고 있는 게 깊은 뜻이 있어 보입니다."

"흐음, 언제 열리는가?"
"지금쯤 시작했을 것입니다."
"일어서게, 가 봐야겠네."

정약용 일행들이 달려간 훈련도감 분영엔 기우제가 한참이었다. 이전엔 기우제를 좀더 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쪽도 있었다. 그것은 대지를 숭배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살아온 생활의 풍속을 이용하는 자들로 가뭄이 오면 여인네의 달거리에 무명으로 된 개짐을 땅에 묻고 무릎 꿇고 기원했다.

그런데도 비는 오지 않고 땅은 버석버석 말라갔다. 대비전의 명을 받은 소격서의 큰 무당은 나름대로 비방이란 걸 마련했다. 속곳을 벗고 치마를 두르고 기다란 천을 늘어뜨린 채 굿판에 섰다. 영신(迎神)맞이였다.

그녀는 살랑살랑 치마를 흔들며 바람의 신이 흥분하도록 음란한 춤을 추었다. 장고와 북소리 장단이 덩더꿍 울면 큰무당은 귀두도(鬼頭刀)를 휘리릭 내리치며 바람을 잘랐다. 가뭄이란 양(陽)의 기운이 음(陰)을 이겨 하늘의 빗장을 꽁꽁 잠근 탓이므로 무녀는 신도를 휘두르며 음란한 무도를 펼쳤다.

"자, 어서 벌려라!"

큰무당의 목소리가 악다구니처럼 들리며 자신의 영기(靈旗)로 신의 틀어진 비윗살을 고쳐잡을 모양이었다. 수줄을 연장해 올가미를 만든 그녀는 비녀목에 꽂으며 음담을 주고받았다.

"자, 똑바로 벌려!"

스물 한 명의 숫자는 일곱 명씩 셋으로 나뉘어 삼각으로 위치를 벌린 채 좌우로 흔들리며 음담을 주고받았다.

"똑바로 세워라, 세워!"
"세워라, 세워!"

행동은 일사분란하게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세게 질러라, 질러!"
"질러라, 질러!"

난장이었다. 고통의 음란함과 어지러운 춤, 이것은 삶의 한 자락이었다. 춤은 춤일 뿐이지만 이러한 춤은 풍요(風謠)로서 한자릴 차지한다. 대비전에서 올리는 기우제지만 내뱉는 말은 흉악했다. 궁원을 싸고 도는 후덥한 놀이판 속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토닥거렸다. 그때 군자정으로 달려온 사헌부 서리배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수찬 나으리, 대제학 대감께서 변을 당했습니다."
"변이라니?"

"대들보에 목을 걸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대감께선 과거시험의 주시관으로 누구보다 공정한 분이신데 갑작스레 목숨을 끊은 이율 알 수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서과도 그쪽으로 가 사체를 검시하고 있으니 나으리께서 빨리 오시라고 당부십니다."
"알았네."

정약용은 대제학 대감의 저택인 안국동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집안 깊숙이 금줄을 치고 주위를 서성거리던 서과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제학 대감이라면, 자신이 죽은 후 드러난 모양에도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대감의 주검을 살피면, 입을 벌린 채 혀 끝이 이 밖으로 이푼(二分) 남짓 나와 있습니다. 얼굴은 검붉고 입 주변과 가슴 앞에 거품이 떨어져 있는 데다 양손은 주먹을 쥐었고 엄지손가락과 두 발끝은 바로 뻗었습니다."

"넓적다린 어떠냐?"
"피 맺힌 자국이 마치 불로 뜸질하여 생긴 흔적 같습니다. 더구나 윗배에서 아랫배까지 모두 꺼져 있고 색깔은 푸르고 검습니다."

"둔부엔 대소변이 나와 있더냐?"
"예에, 항문에도 피가 한두 곳 있습니다."
"흐음, 이건 숨통 아랠 졸린 것이다."

"그렇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그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자액(自縊)이라면 사체는 당연히 눈 감고 입술이 검겠지요. 대감 스스로 목을 걸었다면 당연히 숨통 위일 겁니다. 그리됐으면 입은 닫히고 이를 꽉 다물었으며 혀가 이에 닿아 나오지 않았을 것이나 대제학 대감의 주검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올가미를 만들어 뒤에서 당긴 것으로 보입니다."

[주]
∎사괴(死䙡) ; 올가미
∎녹두패(綠豆牌) ; 제왕의 잠자리 시중으로 쓸 궁인을 뽑을 때 쓰던 녹두색 패
#추리,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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