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사진은 행주대첩을 형상화한 그림.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조선과 일본은 크게 2차례의 대결을 펼쳤다. 임진왜란(임란) 때는 전면전 형태로 대결을 벌였고, 구한말 때는 그런 것 없이 대결을 펼쳤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은 임란 때는 일본을 물리쳤고, 구한말 때는 일본에게 허무하게 패했다. "그거야 임란 때는 일본이 약했고 구한말 때는 일본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구한말 조선, 일본에 왜 그렇게 허망하게 국권 내줬을까센고쿠 시대 즉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한 임란 당시의 일본은 사상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다. 열도 전체가 일본이라는 깃발 아래 단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걸출한 영웅까지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일본군은 조총을 보유한 탓에, 군사적으로도 조선군을 능가했다. 그런데도 조선은 일본과의 전면전에서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 비해 구한말의 '한일전'은 너무 싱겁게 종결되었다. 일본이 조선보다 먼저 개항했고 과학기술이 앞섰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별다른 전쟁도 없이 조선이 그처럼 쉽게 국권을 내준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우리는 서민대중과 특권층의 관계를 꼽을 수 있다. 임란이 벌어진 16세기에는 조선의 서민대중과 특권층이 상호 화합한 데 반해, 구한말 즉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팀워크'가 두 시기의 차이를 결정했던 것이다.
임란이 벌어지기 25년 전인 1567년, 조선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선조 임금의 즉위를 계기로 조선의 지배층이 질적으로 바뀐 것이다. 훈구파라 불린 종래의 지배층은 각종 정변에서 승리를 거둔 공신세력으로 구성되었다. 그에 비해 사림파라 불린 새로운 지배층은 정상적인 정치 시스템을 밟고 정권을 장악한 선비세력으로 구성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잘 나타나듯이, 정변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력은 원칙보다는 힘을, 공정성보다는 부정부패에 기울기 쉽다. 훈구파는 그런 특성을 띠었기 때문에, 16세기에 이르러 보다 건강하고 진보적인 사림파의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훈구파에 비해 건강하고 진보적인 세력이었기에, 사림파는 무엇보다 지역사회를 보다 더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서민대중이 사림파를 신뢰했다는 점은, 사림파가 주도한 범국민 캠페인인 향약운동이 널리 파급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서민대중의 신뢰를 받는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뒤로부터 25년 뒤에 임란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설명해준다. 사림파가 그보다 훨씬 먼저 정권을 장악해서 일찌감치 부패해버렸거나 아니면 훈구파가 임란 당시까지도 계속 권력을 잡았다면, 전쟁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도 서민대중과 호흡하는 젊은 지배층이 전쟁을 주도했기에, 조선은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사림파가 서민대중을 의병투쟁으로 끌어들인 것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이었다. 조선은 정부군의 열세를 의병투쟁으로 보완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사림파도 부패하고 보수적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꽤 혁신적인 세력이었다. 서민대중이 그들을 믿고 의병투쟁에 나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서민과 특권층의 반목, 조선 멸망의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