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꿈, 두만강에 꽃잎처럼 지다

[역사소설 수양대군37] 이징옥의 최후

등록 2011.11.08 10:50수정 2011.11.0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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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른 채 불려나온 정종과 이행검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긴장했다.

"조정에서는 '역도의 위협에 복종한 자에게 은전을 베풀겠다'고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그대들이 아무리 겁박에 못 이겨 이징옥의 명을 따랐다 해도 내가 아니라면 아니다. 그대들에게 시간이 많지 않소. 징옥이 강을 건너가면 그대들은 영원히 역적의 죄를 벗어날 수 없소. 그대들이 징옥을 잡으면 후히 상을 내리겠다는 징표가 바로 이것이오."


석동이 품에서 밀지를 꺼냈다. 한명회의 수결이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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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결 한명회의 수결 ⓒ 이정근

"한명회가 어떤 사람이오?"

정종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한명회가 도대체 누구냐는 표정이었다.

"수양대군의 오른팔이오."
"수양대군이 쫓아와도 수습하기 어려운 이 절박한 시기에 대군의 오른팔 정도에 우리의 명운을 걸란 말이오?"

석동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정종의 눈매가 매서웠다.


"이번 정난에서 대호장군은 물론 영의정과 병조판서가 참살된 거 알고 있지요?"
석동이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나직이 물었다.

"들어서 알고 있소."

정종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들을 누가 죽였는지 궁금하지 않소?"
"그야 대군이지요."
"대군을 누가 움직였다고 생각하오?"
"누긴 누구겠소. 소신에 따라 했겠죠."

정종의 말을 듣고 있던 석동이 빙그레 웃으며 이행검을 바라보았다. 들은 대로 설명하라는 것이다.

"한명회로 말할 것 같으면 대군의 장자방으로..."

잠자코 있던 이행검이 입을 열었다.

"정난이 있던 날 저녁, 어명으로 황보인, 한확, 정인지, 이양, 조극관을 시좌소로 불러들였는데 황보인과 이양, 조극관은 죽었지만 한확과 정인지는 살았소. 세상의 말쟁이들은 죽을 팔자는 죽었고 살 팔자는 살았다고 하지만 그들이 생사는 한명회의 손끝에서 나왔소.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殺生簿)에 따라 산 자는 살았고 죽은 자는 죽었소."

정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면부지의 석동의 말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이행검의 말은 왠지 믿음이 갔다.

철령 이남의 정보가 차단된 변방의 무관으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그는 한성의 정변도 길주에 있던 이징옥이 종성으로 와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생명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 경각에 달려 있다.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역적이 될 수 도 있고 공신이 될 수도 있다.

'그의 그릇은 황제를 담을 수 없다' VS '기회는 영웅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행검은 더 절박하다. 호종부사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수양의 총애를 받은 무관이라면 이징옥의 거사에 분연히 맞서야 주군에 대한 도리다. 자신보다 수양의 시혜를 덜 받은 박호문은 목숨을 바쳐 맞섰다. 헌데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여기까지 밀려왔다.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역부족이었다고 변명해도 기회주의자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발적 협조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거사가 실패한다면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수양은 왕이 될 그릇인데 이징옥의 그릇은 아무래도 황제를 담을 수 없어."

이행검이 갈등하고 있을 때, 이징옥도 고민에 휩싸였다.

"기회는 영웅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영웅이 기회를 타야 한다."

욕망이 솟아올랐다. 황제의 자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강을 건너가 너희 족장과 결말을 볼 것이다. 돌아가 그리 전하라."

밀사 김수산을 돌려보낸 이징옥이 종성판관 정종(鄭悰)을 불렀다.

"강을 건너갈 것이다. 준비하라."

절체절명의 기로다. 강을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설혹 돌아온다 해도 역적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이 밀려왔다. 하지만 결단해야 한다.

"야간에 행군하면 군사들이 부대와 행오(行伍)를 잃어 버리게 되고 더구나 어두운 밤에 강을 건너는 것은 위험합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징옥이 함길도 도절제사라 하더라도 종성의 지형지물과 사정은 정종이 꿰뚫고 있다.

"도진무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징옥이 이행검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의견 중에서 두 사람이 찬성하면 그게 대세가 된다. 이징옥은 이 밤 두만강을 건너려 하고 정종은 날이 새기를 기다리자고 한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향방이 갈라진다.

"군사가 이동하려면 많은 식량도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이 밤에 강행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을 벌고자 한 정종의 의도를 간파한 이행검이 정종 편에 섰다.

"알았다. 이 밤 푹 자고 내일 새벽 출발한다."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이징옥이 호쾌하게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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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두만강(푸른색). 붉은 원안이 종성이다 ⓒ 이정근


삼경(三更)이 지난 어스름 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자원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버지 이징옥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아바지! 아바지!!"

곁으로 다가간 자원이 이징옥을 깨웠다.

"왜 그러느냐?"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짜증을 냈다.

"흉몽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이길래 이 소란이냐?"
"꿈에 아버지의 머리에서 피가 나와 의자 다리로 흘러내렸습니다."
"꿈에 피를 보면 길몽이란다. 네가 피곤했나 보구나. 이른 새벽 떠나려면 어서 한 숨 붙이거라."

아들 자원이를 자리로 돌려보낸 이징옥이 깜박 잠이 들었다. 그 순간 지붕을 뚫고 내려온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가 칼을 뽑아 이징옥의 오른팔을 찍었다.

"으윽!'

비명소리와 함께 이징옥이 자리에서 튀어 오르며 자객의 칼을 나꿔챔과 동시에 발길이 면상을 갈겼다. 사나이가 쓰러지는 거의 같은 시각, 건장한 사나이 세 사람이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다. 그들 역시 이징옥의 칼날 앞에 풀잎처럼 쓰러졌다. 이징옥이 화살 맞은 호랑이처럼 피를 흘리며 뜰 밖으로 나왔다. 아들 자원과 윤원, 서자 철동이, 부관 박문헌이 그 뒤를 따랐다.

횃불을 든 군사들이 벌떼처럼 밀려들었다. 정종이 동원한 내상군(內廂軍)이었다. 신들린 듯 한 이징옥의 칼춤에 수십 명이 쓰러졌다. 고함과 비명과 선혈이 범벅이 된 아수라장이었다. 혈로를 뚫고 나가려는 순간, 백여 명의 궁수들이 이징옥의 앞을 가로 막았다.

"이징옥에 고한다. 헛된 꿈을 버리고 죄를 받아라."

석동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 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물러서라."

이징옥이 포효했다. 좁혀오던 군사들이 멈칫했다.

"다시 한 번 고한다. 역적은 칼을 버리고 오라를 받아라."
"역적의 개가 나에게 역적이라 하니 길 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역사의 증인이 되려거든 내 뒤를 따르고 수양의 개가 되려거든 활을 쏘거라."

이징옥이 가슴을 열어 젖혔다. 자객의 칼에 찍힌 어깨에서 선홍빛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쏘아라."

석동의 고함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중과부적. 이징옥을 따르던 30여 명의 군사들은 낙엽처럼 쓰러졌다. 이징옥의 대륙의 꿈도 사라졌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장옥 #두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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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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