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완 채석장의 미완의 오벨리스크, 위쪽 부분에 금이 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박찬운
우리는 이곳에서 여장을 푼 다음 바로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배에서 나와 아스완의 고대 채석장에 갔다. 채석장은 아스완의 나일강 동안에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신전의 탑문이나 피라미드·오벨리스크·신상 등에 사용된 화강석의 고향이다. 아스완의 화강석은 붉은색이다. 화강석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집트뿐만 아니라 인근 국가, 심지어는 로마까지 수출됐다고 한다.
지금 이 채석장에는 고대에 채석을 하다가 미완에 그친 오벨리스크 하나가 놓여 있다. 만일 이것이 완성돼 나일강으로 옮겨져 나일강변 어딘가의 신전에 장식됐다면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오벨리스크가 됐을 것이다. 길이 41m, 무게는 1267t에 이른다고 한다.
이 화강석이 이렇게 미완의 상태에서 남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너무 무거워 옮길 수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표면에 나 있는 금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업 중에 화강석에 금이 가는 바람에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어 작업이 중단됐다는 것. 자세히 보니 화강석 끄트머리에 긴 금이 가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크고 단단한 화강석을 절단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물과 나무 쐐기였다. 화강석에 홈을 내고 거기에 나무 쐐기를 박은 다음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해 화강석이 깨진다. 미완의 오벨리스크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도 그 쐐기 자국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초보적 기술로 이 거대한 돌을 다듬었다고 생각하니... 참 신기하다.
말이 나온 김에 오벨리스크 이야기 좀 하자. 오벨리스크는 고대 나일문명의 상징물 중 하나다. 모든 신전에는 오벨리스크가 장식돼 있었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졌고, 지표면에서는 사각으로 시작하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 맨 꼭대기는 피뢰침 같은 모양이 된다. 오벨리스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대지의 신이 하늘의 신과 교합하는 것의 상징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태양신 자체라고도 한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로마인들의 눈에도 매우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 많은 황제들이 이집트에서 발견된 오벨리스크를 배로 실어가 로마 시내 한 가운데 장식품으로 썼으니 말이다. 현존하는 이집트산 오벨리스크는 총 29개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이집트에는 9개만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 국외에 있는데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역시 로마제국 시절 이집트를 속주화한 로마다. 모두 11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국이 4개, 터키·프랑스·폴란드·이스라엘·미국이 각각 1개씩을 가지고 있다.
원래 아스완에 가면 필레 신전을 보고자 했다. 그런데 여행 일정에 이것이 빠져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행사가 필레 신전의 의미를 간과한 모양이다. 사실 아스완에서 가장 볼만한 곳은 이곳인데 말이다.
필레 신전은 이시스 신전이 봉헌된 곳이다. 처음 이곳에 신전이 들어선 것은 신왕국 마지막 즈음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곳에는 로마제국 시절에도 많은 건축물이 들어섰다. 지금도 그 잔영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트라야누스 정자가 그것이다. 이곳은 바로 이집트 신전 중에서 마지막까지 명맥을 유지한 신전으로 유명하다. 앞에서 본대로 이집트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곳도 이곳이다.
이 신전의 명맥이 끊어진 것은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에 있다. 6세기에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신전을 폐쇄한다. 그 후 성소의 문은 파괴됐고, 신관들은 고문당했으며 신상 봉안소는 세속의 손길로 더럽혀졌다. 그리고 원기둥이 있는 홀은 교회가 됐다고 한다. 이 신전도 아스완 하이뎀의 완공으로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가 동요했고, 마침내 사람들은 이 신전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원래의 신전은 낱낱이 해체돼 필레섬을 떠나 인근의 작은 섬 아길키아로 옮겨졌다. 1980년 3월 10일이었다. 신전이 다시 태어난 날이다.
콤옴보 신전, 호루스와 세베크의 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