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일가의 선산은 어디였을까

[경주여행 4] 무열왕릉

등록 2012.10.15 19:04수정 2012.10.2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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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 초상. 경주 통일전에 게시된 그림을 촬영한 것이어서 원작과는 비율, 이미지 등이 다르다. ⓒ 정만진

법흥왕릉 옆의 효현리 탑에서 500m 정도 나오면 길은 4번 도로와 만난다. 삼거리 오른쪽에는 효현교가 대천에 걸려 있다. 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얕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무열왕릉이 나타난다. 서악 고분군·김인문 묘·김양 묘도 함께 있고, 선도산 입구로 들어서면 진흥왕릉·진지왕릉·헌안왕릉·문성왕릉도 있다. 또, 정상까지 올라가면 마애삼존입상도 있다. 어찌 빨리 가보고 싶어지지 아니하는가.

642년(선덕여왕 11) 가을 7월,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는다. 8월에는 장군 윤충을 보내 대야성(경남 합천)을 점령한다. 대야성 성주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패전한 김품석과 김춘추의 딸 고타소는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김춘추는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얼마 후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출발했다. 그러나 보장왕은 본래 고구려 영토였던 죽령(경북 문경) 서북 지방을 돌려주면 원병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결국 연개소문은 자신들의 요구에 불응한다는 이유로 김춘추를 가뒀다가 풀어준다.

우물물이 피로 변하고... 왕이 붕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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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성터가 경남 합천의 황강 너머로 보이는 풍경. 백제 장군 윤충의 공격을 받아 이곳 성주였던 김품석이 전사한 곳이다.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 정만진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는 당나라로 간다. 당태종에게 군사지원을 약속받은 김춘추는 서해로 돌아온다. 그러나 백령도 앞바다에서 고구려 순찰병을 만난다. 온군해가 김춘추의 옷을 대신 입고 고구려군을 속이는 동안 김춘추는 작은 배로 탈출한다.

654년(진덕여왕 8) 봄 3월,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다. 부모가 모두 왕족인 성골(聖骨)이 왕위를 계승해온 신라였으니 처음으로 진골(眞骨)왕이 탄생한 것이었다.

660년(무열왕 7) 7월 13일,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는다. 그러나 무열왕은 그 이듬해인 661년 6월에 사망한다. 삼국사기에는 '6월에 대관사(大官寺)의 우물물이 피로 변하고, 금마군(전북 익산)에서는 땅에 피가 5보 넓이로 흘렀다. 왕이 붕어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대관사는 '대관관사'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된 전북 익산의 왕궁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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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사터로 추정되는 전북 익산 왕궁리 절터의 5층석탑 ⓒ 정만진


무열왕릉 건무문을 들어서면 곧장 오른쪽에 국보 25호가 기다리고 있다. 문무왕이 즉위하자마자 세운 '태종무열왕릉비'다. 과연 입장료를 받은 값어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무열왕릉은 첨성대·안압지·오릉·대릉원·포석정·분황사와 더불어 경주에서 몇 안 되는 유료 답사지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판은 무열왕릉비가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거느리고 있다고 자부한다. 귀부는 거북(龜) 모양의 받침돌(趺)을 말하고, 이수는 용(螭)을 새긴 머릿돌(首)을 가리킨다. 무열왕릉비는 빗돌(碑身)은 잃어버린 채 그것을 받쳤던 받침돌과, 머리 위에 얹었던 이수만 간직하고 있다.

거북의 목에 붉은 줄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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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고의 걸작 귀부와 이수로 평가받는 무열왕릉의 국보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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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두무진의 풍경. 김춘추는 당나라에 원병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 인근에서 고구려 수군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부장 온군해가 김춘추의 복장을 바꿔입고 고구려 수군을 속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 정만진


비신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무열왕릉비는 언뜻 보면 제 모습을 다 갖춘 듯 여겨진다. 이수가 귀부의 등에 바로 얹혀 있어서 마치 빗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높이가 110cm나 되는 이 머릿돌은 좌우로 여섯 마리의 용이 셋씩 뒤엉킨 채 여의주를 물고 있다. 조각이 너무나 세심해서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수 한가운데에는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대왕지비) 여덟 글자까지 새겨져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는다. 글씨는 무열왕의 차남인 김인문이 썼다고 전한다.

길이 333cm, 너비 254cm, 폭 86cm의 받침돌에는 돌거북이 새겨져 있다. 돌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면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내판은 이를 두고 '신라인의 진취적 기상'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거북의 목에 붉은 줄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거북은 지금 세차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용을 쓰고 있는 관계로 목에 붉은 줄이 생겼다.

사적 20호인 무열왕릉은 비각 바로 뒤편에 있다. '太宗武烈王陵'(태종무열왕릉)이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한 빗돌 뒤로 왕릉이 보인다. 무덤 둘레를 에워싸고 있던 호석들은 흙에 묻혀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긴 세월의 무게 탓이다.

문무왕은 왜 이곳에 아버지의 무덤을 마련했을까. 분명하게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이 일대가 아마도 김춘추 가문의 대를 이은 선산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무열왕릉 뒤에 줄을 지어 서 있는 거대한 네 기의 고분들이 바로 김춘추의 아버지 등 선조들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경주서 당나라 장안까지 가려면 3~4개월

사적 142호인 '서악동 고분'들은 앞에 것부터 각각 160·186·122·100m의 둘레를 자랑한다. 무열왕릉의 둘레가 100m인 것을 감안하면 모두들 왕릉 이상의 수준이다. 본래 이토록 거대하지는 않았을 듯한데, 가계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왕가(王家)가 됐으므로 뒤에 봉분들을 더 키우고 가다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서악 고분군은 '옆으로 나란히'를 한 듯 정확하게 한 줄로 놓여 있고, 서로 붙다시피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가 하면,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도 아버지 무열왕릉 앞을 지나는 4번 도로 건너편에 있다. 김인문(629∼694)은 23세에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온 이래 아버지 무열왕·형 문무왕·외삼촌 김유신을 도와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진덕여왕 재위 7년(647∼654) 동안 당나라를 아홉 차례나 오가며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낸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경주에서 당나라 서울 장안까지 오가는 데에 3∼4개월이나 걸렸던 당시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던가 헤아릴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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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 뒤의 서악고분군. 김춘추의 선조들 무덤으로 여겨진다. 고분군 너머로 거대한 마애불이 있는 선도산 정상이 보인다. ⓒ 정만진


김인문 묘 옆에는 김양 묘도 있다. 장보고와 함께 힘을 합쳐 김우징을 신무왕에 오르게 했던 김양(808∼857) 또한 무열왕의 9세손이다. 선도산 자락 일대가 김춘추 일가의 가족묘지였다는 이야기다.
#김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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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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