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두무진의 풍경. 김춘추는 당나라에 원병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 인근에서 고구려 수군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부장 온군해가 김춘추의 복장을 바꿔입고 고구려 수군을 속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정만진
비신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무열왕릉비는 언뜻 보면 제 모습을 다 갖춘 듯 여겨진다. 이수가 귀부의 등에 바로 얹혀 있어서 마치 빗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높이가 110cm나 되는 이 머릿돌은 좌우로 여섯 마리의 용이 셋씩 뒤엉킨 채 여의주를 물고 있다. 조각이 너무나 세심해서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수 한가운데에는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대왕지비) 여덟 글자까지 새겨져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는다. 글씨는 무열왕의 차남인 김인문이 썼다고 전한다.
길이 333cm, 너비 254cm, 폭 86cm의 받침돌에는 돌거북이 새겨져 있다. 돌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면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내판은 이를 두고 '신라인의 진취적 기상'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거북의 목에 붉은 줄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거북은 지금 세차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용을 쓰고 있는 관계로 목에 붉은 줄이 생겼다.
사적 20호인 무열왕릉은 비각 바로 뒤편에 있다. '太宗武烈王陵'(태종무열왕릉)이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한 빗돌 뒤로 왕릉이 보인다. 무덤 둘레를 에워싸고 있던 호석들은 흙에 묻혀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긴 세월의 무게 탓이다.
문무왕은 왜 이곳에 아버지의 무덤을 마련했을까. 분명하게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이 일대가 아마도 김춘추 가문의 대를 이은 선산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무열왕릉 뒤에 줄을 지어 서 있는 거대한 네 기의 고분들이 바로 김춘추의 아버지 등 선조들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경주서 당나라 장안까지 가려면 3~4개월사적 142호인 '서악동 고분'들은 앞에 것부터 각각 160·186·122·100m의 둘레를 자랑한다. 무열왕릉의 둘레가 100m인 것을 감안하면 모두들 왕릉 이상의 수준이다. 본래 이토록 거대하지는 않았을 듯한데, 가계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왕가(王家)가 됐으므로 뒤에 봉분들을 더 키우고 가다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서악 고분군은 '옆으로 나란히'를 한 듯 정확하게 한 줄로 놓여 있고, 서로 붙다시피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가 하면,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도 아버지 무열왕릉 앞을 지나는 4번 도로 건너편에 있다. 김인문(629∼694)은 23세에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온 이래 아버지 무열왕·형 문무왕·외삼촌 김유신을 도와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진덕여왕 재위 7년(647∼654) 동안 당나라를 아홉 차례나 오가며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낸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경주에서 당나라 서울 장안까지 오가는 데에 3∼4개월이나 걸렸던 당시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던가 헤아릴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