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가 11일 오전 대전광역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방문하고 나오며 취재진에 소감을 밝히고 있다.
권우성
일제 당시 금융조합은 군(郡) 단위에는 1개소, 그보다 규모가 큰 시(市)나 대도시에는 여러 개의 점포를 두고 있었다. 참고로 마산시의 경우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을 비롯해 신(新)마산과 구(舊)마산에 각각 금융조합이 하나씩 있었다. 당시만 해도 큰 도시였던 마산에는 이들 외에도 농민을 대상으로 한 내서금융조합과 사금융(私金融)인 마산금융회사 등도 있었다.(허정도 글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참조)
서민금융기관으로 출발한 금융조합이 '친일'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일제당시 금융조합 본래의 취지인 '농촌 금융' 차원을 넘어 농민들을 착취하는 수탈 기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금융조합 연구의 드문 명저인 <일제하 금융조합 연구>(혜안, 2002)를 펴낸 이경란은 이 책에서 일제 당시 금융조합의 반서민적 행태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대한제국 정부는 농민의 궁핍을 줄이고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소농(小農)이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금융기구를 만들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1907년 '금융조합 규칙'을 제정했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금융조합은 상층 농민과 지주가 혜택을 입는 기구로 바뀌었다. 담보물을 제공할 수 있는 자에게만 돈을 빌려준 것이 그 한 예다.
그러다가 1910년 한국이 병탄되고 총독부가 들어선 뒤로 금융조합은 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1910년대에는 지주 중심의 농업개량 정책을 수행했으며, 1920년대에는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또 1930년대에는 농촌진흥운동의 성공에 협력했고, 중일전쟁 이후 국가총동원체제 하에서는 농촌과 농민의 생산력을 전쟁에 총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물론 금융조합을 일진회, 국민총동원연맹, 대화동맹 등의 어용 친일단체로 규정짓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오히려 산림조합과 같은 총독부 산하기구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앞에서 소개했듯이 금융조합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하수인으로 부린 격이니 그곳에 근무했던 조선인들의 경력은 그리 자랑스러울 것은 못 된다.
안 후보의 조부, 당시 무슨 직책을 맡았나다음, 안 후보 조부의 당시 직책(직위) 건이다.
<한겨레> 기사에는 안 후보의 조부가 금융조합 근무 당시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안 후보 아버지가 <여성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때는 일본인이 지점장을 하던 시절이라 해방된 후에야 농협 지점장을 지내셨죠"라고 한 대목을 두고 일부 블로거들은 "상당한 고위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겨레>는 썼다.
금융조합은 기관장인 조합장과 그 아래 이사, 그리고 몇 명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오늘날 농협 지점장격인 조합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이사와 직원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안 후보 측에서 아직 관련 자료를 내놓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추정컨대 안 후보의 조부는 금융조합의 '직원'으로 근무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이유는 금융조합 이사는 '상고 출신'이 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데 있다. 명사 가운데 금융조합 이사 출신이 몇 사람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역사 앞에서>라는 책을 쓴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다. 1937년 경성법전(서울대 법대 전신격) 졸업 후 그는 한동안 전남, 경북 등지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지냈다. 또 일본 중앙대 법학과 출신으로 7선 의원을 지낸 이재형(李載灐) 전 국회의장도 경남, 경기 등지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지냈다.
그런데 일제 당시 '금융조합 이사'는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가 선택 가능한 최고의 직업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물론 '최고'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판검사나 군수로 나가는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인 청년들의 선호도가 높았던 만큼 일제에 포섭되거나 하수인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을 자신의 처세로 보여준 사람이 있다. 대성그룹 창업자 김수근(金壽根, 2001년 작고) 회장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