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소재.
김종성
안 그래도 이성계는 자신을 여진족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따갑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는 명나라가 나서서 자신을 이인임의 아들로 만들어버렸으니, 이만저만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성계는 자신을 여진족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이인임의 아들로 바라보는 시선을 동일선상의 문제라고 파악한 듯하다. 둘 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 만한 암초라고 이해한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주원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드러난다.
이 서신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이인임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해명하기에 앞서, 자신이 한민족 출신이라는 점부터 강조했다. "저의 조상은 본래 조선의 후예"라고 소개한 뒤 자신의 가문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그런 다음에 "저와 이인임은 같은 이씨가 아닙니다"라고 강조했다.
자신과 이인임이 무관하다고 밝히면 될 일을, 자신이 한민족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한 뒤에 이인임과의 관계를 해명한 것이다. 이성계가 두 문제를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했음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인임의 후예 이성계?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 명나라 이성계는 열심히 해명했지만, 명나라는 이를 무시했다. 명나라는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라는 구절을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라는 명목으로 <대명회전>이란 법전에까지 기록해 놓았다. 이인임의 후예라는 말에 이성계가 발끈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조선을 압박하는 데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법전에까지 기록해둔 것이다.
그 뒤로 조선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 아니니, <대명회전>의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번번이 외면했다. 이 문제를 역사학 용어로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왕실(宗)의 계보(系)에 관한 허위의 무고(誣)를 바로잡는(辨) 문제'란 의미다.
명나라는 이 문제를 빌미로 조선 정부를 최대한 압박했다. 그리고 최대한의 것을 뽑아냈다. 당시 동아시아 '악의 축'인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에 조선 군대를 번번이 동원한 것이다.
조선은 명나라가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명나라에 부탁하는 한편, 명나라의 파병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었다. 혹시라도 명나라가 이성계의 혈통 문제를 확산시킬까봐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때문에 애꿎은 조선 청년들만 명나라의 전쟁에 동원되곤 했다.
종계변무 문제는 1589년에 가서야 해결되었다. 1394년에 시작된 문제가 이때 해결된 것이다. 그 해에 명나라는 <대명회전>을 개정하는 기회에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라는 대목을 삭제했다. 근 200년간이나 시간을 끌면서, 조선을 이용할 대로 이용한 뒤에야 이 문제를 종결한 것이다.
죽은 이인임은 이성계는 물론이고 이성계의 후손들까지도 근 200년간이나 괴롭혔다. 드라마 속의 이인임이 이성계의 발목을 붙잡듯이, 실제의 이인임은 죽어서까지도 이성계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성계에 대한 이인임의 복수는 그처럼 집요하고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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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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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를 200년 동안 괴롭힌 '가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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