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시장의 풍경.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경제사학자인 김용만은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란 책에서 상평통보가 통용된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거래된 노비 151명의 몸값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노비의 몸값은 일반적으로 5~20냥이었다. 5냥만 있으면 노비 1명을 평생 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떤 때는 40~50%였고 적어도 30% 이상은 됐다는 점, 노비들이 농업생산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5냥으로 노비 1명을 평생 고용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으로 치면 '5냥으로 노동자 1명을 평생 고용할 수 있다'는 말에 해당한다.
드라마 <전우치>에서는 '5천 냥이면 노비 몇 명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5천 냥이면 최고 1천 명의 노비를 평생 고용할 수 있었다. 대기업을 꾸릴 만한 거금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1냥 즉 100푼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보수파가 정조 임금을 죽이기 위해 자객에게 지급한 수고비가 얼마였는지 살펴보면, 1냥의 가치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을 죽이는 대가로 받은 돈은 15냥사도세자를 죽인 보수파는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되자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그들은 지금의 동 직원에 해당하는 전흥문이란 사람을 자객으로 고용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전흥문은 정조 즉위 이듬해인 1777년에 서울 광화문광장의 왼쪽에 있는 경희궁에 침투했다.
신분증을 위조해서 궁궐 정문을 통과한 전흥문은 건물 지붕을 타고 정조의 침소까지 접근했다. 때마침 밤 늦게 책을 보고 있었던 정조는 이상한 발자국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옷을 벗지 않고 잠드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이상한 발자국 소리를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상한 발자국 소리의 진원지가 근처 건물의 지붕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자기 머리 위에서 멈추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정조는 고함을 쳤고, 전흥문은 급히 도주했다.
전흥문은 얼마 뒤에 제2차 시도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궁궐 담을 넘다가 경호원에게 발각되어 체포됐다. 그를 붙잡아 놓고 심문하는 과정에서 수고비의 액수도 밝혀졌다. 정조 1년 8월 11일자(1777년 9월 12일) <정조실록>에 의하면, 전흥문이 받은 수고비는 상평통보 15냥 즉 1500푼이었다.
왕을 죽여주는 대가로 15냥이 수수됐으니, 1냥이 얼마나 큰돈인지 명확히 드러난다. 수많은 사극에서 자객이 몇 천 냥의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확연히 대조적이다.
영조와 정조가 왕위에 있었던 18세기 중후반에 조선의 통화량은 300만 냥 정도였다. 사극에서처럼 자객에게 수천 냥을 지급하고 현상금으로 5천 냥을 지급하면, 얼마 안 가서 조선의 모든 돈은 자객 같은 사람들에게 죄다 집중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