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3일 서울문화재단의 주최로 덕수궁 함녕전 앞에서 열린 덕혜옹주 연극.
김종성
덕혜는 일본 귀족 소녀들의 학교인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하지만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세라복을 입은 그는 항상 우울하고 쓸쓸한 표정이었다. 반 친구들이 말을 걸어도 그냥 "하이, 하이"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하루는 소마 유키카란 친구가 덕혜에게 시비를 걸어 보았다. 소마가 지은 <마음에 놓은 다리>란 책에 따르면, 소마는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을 할 텐데, 너는 왜 안 하니?"라고 물어봤다. 상처를 받을 만한 말인데도 덕혜는 말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상처를 받았겠지만, 대꾸할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덕혜는 멍한 표정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덕혜는 사실상의 인질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는 열다섯 살 때인 1926년에 오빠인 순종 황제가 위독해지자, 일본의 허가를 받아 한국에 와서 오빠를 간호했다.
하지만 오빠는 곧 죽고 말았다. 이때 일본은 덕혜의 장례식 참석을 불허했다. 분노한 한국인들이 덕혜를 중심으로 뭉칠까봐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덕혜는 장례식도 못 보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6·10만세운동을 일으킬 당시, 덕혜는 쓰라린 마음을 누르며 일본 집에서 슬픔을 달래야 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때인 1929년에 덕혜는 어머니 양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런데 일본은 덕혜가 상복을 입지 못하도록 했다. 덕혜는 조선 왕족으로 인정했지만 양귀인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덕혜는 상복도 입지 못한 채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문상객의 자격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이다.
스무 살 된 덕혜에게 일본은 또 다른 불행을 강요했다. 네 살 연상의 대마도 도주인 종무지(소 다케유키)와의 정략결혼을 명령한 것이다. 조선 왕족을 조선인들로부터 확실히 떼어놓을 목적이었던 것이다.
1931년에 거행된 이 결혼으로 덕혜는 이덕혜에서 종덕혜가 되었다. 부인이 남편의 성씨를 따르도록 한 일본 법률 때문이었다. 그 뒤 덕혜의 성씨는 한 번 더 바뀐다. 이 점은 뒤에서 설명한다.
정략 결혼한 덕혜옹주, 우울증과 불면증의 시작결혼을 전후한 시점부터 덕혜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구체적인 병명은 조발성 치매증 즉 정신분열증이었고, 덕혜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고종·순종·양귀인의 잇따른 죽음이 상처가 됐겠지만, 단지 그런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위한 의식이다. 장례식을 통해 산 자는 슬픔을 치유한다. 그런데 덕혜는 일본의 방해 때문에 슬픔을 제대로 치유할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오빠의 장례식 때는 참석조차 못했고, 어머니의 장례식 때는 상복을 입지 못했다. 마음에 한이 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열증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