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두고 있을 때에 세워진 풍납토성. 서울시 송파구 소재.
김종성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평양성 점령의 결과로 백제가 한성에서 한산(漢山)으로 천도했다고 말했고, '지리지'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도읍을 한성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백제본기'의 '한산'은 한양의 산을 가리키므로 '지리지'의 '한성'과 같은 표현이다.
'백제본기'와 '지리지'를 종합하면, 백제가 평양성을 점령한 뒤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는 말이 된다. 한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삼국사기>의 한성은 지금의 서울 및 인근 지역을 가리킬 때도 있고 황해도 재령을 가리킬 때도 있다.
이 점을 근거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점령한 뒤 지금의 수도권에서 재령으로 천도했다고 정리했다. 고대 국가들은 도읍을 옮길 때 기존 지명을 그대로 갖고 가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해설이다.
이렇게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지고 동아시아가 요동치는 틈을 타서, 백제는 중국은 물론이고 고구려까지도 압박하는 전략을 취했다. 어수선한 시기에 매우 공격적으로 대외팽창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5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가 주춤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5세기 초반부터 중국대륙의 분열이 수습 국면에 접어들자, 고구려가 중국보다는 한반도 쪽으로 힘을 집중하면서 백제가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427년에 장수태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한반도 쪽에 치중하겠다는 전략의 표현이었다. 참고로, 고구려 군주의 정식 명칭은 '왕'이 아니라 '태왕'이었다. 장수태왕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밀어냄으로써 한반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을 도와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백제 개로왕이다. 만약 개로왕이 중대한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면, 장수태왕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남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 평양성을 점령하고 황해도 재령으로 천도했던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개로왕의 실책이 크게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