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부자 관계, 오히려 인간적이네요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⑤] <이(蝨)>

등록 2013.02.19 10:30수정 2013.03.0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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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립(倒立)한 나의 아버지의
얼굴과 나여

나는 한번도 이(虱)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어두운 옷 속에서만
이는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울린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의
수염을 바로는 보지
못하였다

신문(新聞)을 펴라

이가 걸어나온다
행렬(行列)처럼
어제의 물처럼
걸어나온다
(1947)

이 작품은 김수영의 나이 스물일곱 살인 1947년에 쓰였습니다. 앞서 본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과 <아메리카 타임 지>가 쓰인 해와 같습니다. 이 해에 수영은 유명옥 뒷간 방에서 암 치질로 제법 큰 고생을 합니다. 세수할 때조차도 누운 채로 여동생 수명의 시중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대개 몸져누워 있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숨만 쉬며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수영은 다행히도 그런 일들에 덧붙여 시를 쓰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요. 그렇게 해서 수영은 치질로 와병하던 그 해에 이 작품과 더불어 첫머리에 소개한 두 작품을 합해 모두 세 편의 시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들 세 작품을 '와병기 3부작'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병에 걸린 이들은 모든 게 불안합니다. 우선 그 병 때문에 아파서 힘든 몸이 그렇게 만들지요. 이유 없이 주변 환경에 예민해지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그저 넘겨도 되는 사소한 일에 까닭 없이 화를 내기도 하지요. 괴로움과 슬픔에 빠져 있다가도 용기를 내어 자신을 추스르기도 합니다. 수시로 조증과 울증을 오가는 착란의 사이클이 그를 지배합니다.


피 끓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극심한 증세의 암 치질로 고통받던 수영이라고 어디 달랐겠는지요. 서구에서 온 위력적인 책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괴로워하다가(<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무기력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생의 의지를 붙잡으려 하기도 합니다.(<아메리카 타임 지>) 히스테리 환자의 불안한 신경증처럼 말이지요.

그런 신경증은 나이 어린 두 동생인 수강과 수경에게도 쏟아졌습니다. 이들 형제는 나이에 걸맞게 집안에서 뜀박질을 치며 장난스럽게 놀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뒤채에서 큰형이 큰기침 소리라도 낼라치면 입을 다문 채로 숨을 죽였지요. 이 '가련한' 형제는 그 세상 무서울 것 없는 큰형이 무서웠습니다. 그들은 형에게서 불호령이나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했습니다.

수영 부친, 동생들을 닦달하는 수영 태도가 못마땅

수영의 부친은 그런 수영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수영이 동생들을 닦달하는 것을 보며 끌끌 혀 차는 소리를 내기도 했지요. 그는 실상 세 아들의 아비이니 그 이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수영의 부친은 그저 혀 차는 소리로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 또한 몸이 아파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시에는 바로 그런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 '아버지'는 수염이 나 있습니다. 화자 '나'는 그 '아버지의 / 수염을 바로는 보지 못하였다'(4연)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화자는 왜 제 아비의 수염을 (안 본 것이 아니라) 못 본 것일까요.

여기서 '수염을 보는 것'의 의미를 따져봅시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지요. 그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얼굴'은 거꾸로 선 모습입니다. 1연 1행의 한자어 '도립(倒立)'에서 알 수 있지요. 그러니 바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습니다. 제대로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버지의 얼굴'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그렇게 거꾸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1연을 보면 관형 표현인 '도립한'(1행)이 수식하는 대상이 '나의 아버지의 얼굴'와 '나'로 동시에 파악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거꾸로 서서 상대를 바라보는 광경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립'의 상태를 '정립(正立; 바로 섬)'의 상태로 보는 관점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상대방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은 어렵거나 불가능해집니다.

물론 그 수식 대상을 '나'로만 한정할 수도 있습니다. '도립한'이 꾸며주는 범위를 '나'로만 한정해서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나'와 '아버지'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은 분명 거꾸로 서 있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경우에도 이들은 상대방을 올바로 볼 수 없습니다.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화자에게 그런 '아버지'는 '이(虱)'와도 같습니다. 2연에 처음 등장하는 이 '이'는 4연과 동일한 문장 구조에 매달려 있습니다. 곧 2연과 4연의 '이'와 '아버지의 수염'은, '나는 한 번도 ○○을 보지 못하다'라는 동일한 문장 구조 속의 '○○', 곧 목적어에 해당하는 성분으로 쓰이고 있어서 그 문장상의 위상이 같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이'가 곧 '아버지'가 되는 것이지요.

이는 기생충입니다. 우리 몸의 피를 빨아먹지요. 그 과정에서 몸을 가렵게 합니다. 자극합니다. 살아 있는 우리 몸을 부르르 떨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3연에서, 이가 어둠 속에서 사람을 부르고 울린다는 것이 바로 그런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

화자는 '아버지'를 바로 그런 '이'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아직 부르르 떨 수 있고, 그리하여 그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또는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확인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거꾸로 선 아버지의 얼굴과 그 위에 난 수염을 '나'는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지금 '나'와 '아버지'는 서로 제대로 볼 수 없는 '도립'의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5연의 '신문을 펴라'는, 그런 '도립'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선언이 아닐는지요.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아버지'를 바로 보기 위한 몸부림 말입니다. 이 문장은 어둠 속에 있던 '이'를 이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해주는 전제 문장인 셈입니다. 실상 '신문'은 세상으로 향하는 창이지 않습니까.

병석에 누워 무기력의 나날을 보내던 수영 부자, 서로 애증의 관계

병석에 누워 무기력의 나날을 보내던 수영 부자는 서로 애증의 관계 속에 있었을 겁니다. 이 시기에 수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시하는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동생들을 닦달할 때 아버지가 혀 차는 소리를 내더라도 수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진짜 속내까지 그랬을까요? 수영은 아버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지요. '이'가 사람을 부르고 울리는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서 울려주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니 내 말을 들으라고 따끔하게 야단을 치기도 하는 여느 아버지의 모습과 같은 것을 말이지요. 스물일곱 살 청년 김수영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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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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