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의사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얼굴을 아름답게 하는 미용의학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 이 분야가 전통적인 의학과 다른 점은 진단기준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속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고 하자. 복통에 대한 진료를 통해 이 증상에 대한 진단명을 내리고, 거기에 따른 처방을 하는 것이 기존의 의학의 진료 과정이다. '통증', '질환' 등 인간의 건강을 저해하는 대상을 규정하고 그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나한테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더 아름다워지거나', '더 젊어보이기 위해' 온다. 충분히 아름답고, 젊어보이는 사람들도 찾아온다. '주름'을 없애기 위해서라든가, '코를 높이기 위해서'라든가 이런 이유에서 찾아오는 게 더 편했다. 적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내가 알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는 '미'에 대한 추구가 목적이다.
그런데 '예쁘게 한다'는 것은 의과대학이나 대학병원에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이건 어떤 증상도 질병도 아니다. 기미, 잡티 같은 색소질환과 여드름은 질환으로 분류되어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답게, 혹은 젊어 보이게 하는 것은 '치료'의 개념과는 다르다. (안면재건 등 심각한 성형은 예외로 하자.)
진단을 정확하게 할 수 없으니, 진료 계획을 정확하게 짜기가 어려웠다. 진단해야 출발지가 정해지는데, 출발지도 모호한 상태에서 '아름다움', '동안'이라는 막연한 도착지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이 오랜 고민이었다. 목적지가 없이 방황하는 느낌이었다. 학회를 가도, 책을 보아도, 기술적인 내용만 있었다. 필러를 예로 들면, 필러를 안전하게 시술하는 방법, 부작용에 대처하는 방법 등은 배울 수 있지만, 어떻게 해야 아름다워지는지 모르는 것이다.
바느질은 잘 할 수 있는데 어떤 옷을 만들어야 예쁜지 모르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멋지다',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조금 다르다. 마치 미식가와 요리사가 다른 것처럼.
교과서적으로 배우지를 못 하니 타고난 미적 감각, 혹은 세월을 통해 체득한 경험을 통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의료라는 것은 의사 혼자 행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고객(환자)이 생각하는 미와 의사가 생각하는 미를 일치시켜야 같은 지향점을 향해 대화가 진전되고, 그 지향점에 이르렀을 때 서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런데 서로가 생각하는 미가 다르다면 당연히 결과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목적지가 한 명은 부산이고, 한 명은 서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어의 부재
의과대학에 입학하면 해부학과 병리학을 배운다. 그 두 학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 뒤에 배울 모든 학문의 기본적인 용어를 그 두 학문을 통해 습득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언어는 아주 중요하다. 그 언어를 통해 의사들이 소통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단어는 오해가 없도록 정의된다. 아름다움에 대해서 표현할 때도 그러한 언어가 필요하다.
현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필요하며, 각자가 추구하는 지향점을 알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하면 예뻐져요' 이 말에 혹했다가 후회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볼 때는 괜찮은데?' '잘 됐네요' '생각만 못 한대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 서로 겉도는 이야기만 하게 된다.
예뻐진다는 건 어떤 걸까? 환자나 의사나 '미'라고 하는 것을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힘들다. 뭔가 막연하면서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답답함이 생긴다. 제대로 표현을 해도 전달이 잘 될지언데, 표현조차 제대로 안 되니 얼마나 문제가 많이 생기겠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아름다워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러한 의문들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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