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라제, 한국 소주 사서 곧 갈게

[불혹 배낭여행기 25] 나이의 벽을 넘어 그리운 사람이 된 친구들

등록 2013.03.25 15:50수정 2013.03.2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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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오리드의 여름 풍경. ⓒ 홍성식


인간이 무지보다 더 경계해야 할 건 인식의 색맹이다. 인식의 색맹, 즉 선입견과 편견은 오해와 갈등을 부르는 폭탄의 뇌관 같은 것.

예컨대 이런 것이다.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은 모두 코란과 폭탄을 든 테러리스트다' '가난한 나라의 밤거리는 위험하다' '여행자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이들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등등. 사실 여행은 이런 선입견이나 편견을 깨나가는 과정이다. 나 또한 그랬다. 배낭을 꾸려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기 전엔 다른 이들 못지않은 편견과 선입견의 덩어리였다.


바로 그 '인식의 색맹' 중 한 부분을 깨뜨린 곳이 마케도니아다. 중학교 시절부터 록음악을 좋아했다. 마케도니아에 도착해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 나는 그 나라의 예술적 인프라와 문화적 토양에 관해 아는 바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이런 조그맣고 가난한 나라에 록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마케도니아의 록 뮤지션과 뱃놀이를

2011년 여름까지 난 마케도니아에 프로 록 뮤지션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앞서 여행기 24편에 소개된 라제 파마코스키는 오리드에서 결성된 록그룹 '백도어 밴드(Backdoor Band)'의 기타리스트. 마케도니아 중앙방송국에 소개된 적도 있는 록그룹의 멤버였다. 유튜브를 통해 라제가 활동하는 밴드의 공연실황과 인터뷰를 보고는 놀랐다. 실력이 만만찮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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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 파마코스키(왼쪽 기타 연주자)는 국적과 인종, 나이를 넘어 나와 친구가 된 마케도니아 사나이다. 록 뮤지션인 그는 여름이 되면 동료들과 함께 자주 야외 공연을 벌인다. ⓒ 홍성식


헌데, 선입견은 라제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 젊은이들이 주다스 프리스트, AC/DC, 메가데스의 연주와 노래를 듣는다는 걸 신기해했다. 마케도니아에서 보자면 한국이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아시아의 소국(小國)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몇몇의 유럽 청년들에겐 "한국은 중국어를 쓰냐 일본어를 쓰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한국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무지와 인식의 색맹 중간에 위치한 것이 보통의 인간이다. 세상일을 다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어쨌건 술과 함께 록음악으로도 죽이 맞은 나와 라제는 한 달 내내 어울려 다니며 벨기에에서 캠핑 온 여고생들과 아일랜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한다는 발랄한 스물여섯 아가씨 앞에서 번갈아가며 마케도니아와 한국 노래를 불러주는 주접(?)을 떨곤 했다.

어떤 날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독일에서 은행원으로 일한다는 여성 여행자의 노래를 들었다. 아마추어를 뛰어넘는 실력을 갖춘 그녀는 앨라니스 모리셋의 노래를 앨라니스 모리셋보다 더 맛깔나게 불렀다. 라제에게 빌린 기타까지 멋들어지게 연주하며. 그런 날은 라제의 단골 재즈바로 몰려가 그 옛날 프랑스의 표상주의 시인 랭보와 베를렌이 즐겼다는 초록빛 화주(火酒) '압생트'를 꼭지가 돌아갈 때까지 마시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나처럼 오리드에 매혹돼 열흘 이상을 그곳에서 머물렀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온 두 소녀 알리나 알리베르티와 미리엄 소피를 태우고 나갔던 뱃놀이도 흥겨웠다. 수백 만 년 전 생성된 투명한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작은 배 위에서 미리엄은 짙은 금빛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로렐라이처럼 노래를 불렀다. 라제 아버지가 배를 가졌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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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발랄한 열아홉 여대생 알리나.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여행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 홍성식


여행자는 가끔, 아니 자주 자신의 인종과 나이를 잊어버린다. 당시 나는 마흔 살, 라제는 스물일곱, 알리나와 미리엄은 겨우 열아홉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메일을 주고받을 리 없지 않은가. 얼마 전 받은 알리나의 메일은 이런 질문을 담고 있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까? 7월 마지막 주 마케도니아 오리드 써니레이크 호스텔에서 만나는 건 어때?"

밤마다 벌어지던 사설 외국어 강습 "마시자" "라 스트라비아"

또 하나의 즐거웠던 에피소드.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은 다국적 친구들의 우정이 빛을 발했던 최고의 순간 중 하나는 카페나 호스텔 정원에서 진행된 '제 나라 언어강습'이었다. 라제는 한국어에 특별한 관심을 표했고, "악센트가 강해서 멋지게 들린다"는 나름의 평을 내놓았다. '고양이'와 '호랑이'를 가르쳐주자 "스몰 캣, 빅 캣"이라며 웃던 그의 환한 얼굴이 지금도 어렵잖게 눈앞에 그려진다.

언어를 배우는데 재능을 가지지 못한 나는 미안하게도 1개월 넘게 머문 그곳의 말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라제에게 배웠던 마케도니아어 중 기억나는 건 딱 2가지. "라 스트라비아"와 "팔라". 앞에 건 "건배" 뒤에 건 "고맙다"란 뜻이다. 라제 역시 오갈 데 없는 술꾼인지라 "마시자"라는 한국식 건배사를 가장 좋아했고, 자주 사용했다. 해서, 우리의 주석에선 "마시자"와 "라 스트라비아" "프로스트"(독일식 건배사)가 무시로 돌아가며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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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오리드의 밤. 가끔은 그 적요함과 평화가 그립다. ⓒ 홍성식


라제의 연인 이레나 이바노브스카와 함께 했던 저녁식사도 기억난다. "요새 나자르는 하루 종일 당신 이야기만 해요"라며 웃던 그녀는 백포도주와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재밌는 주법도 내게 가르쳐줬다. 이레나의 빛나던 금발과 라제의 잘 자란 턱수염이 근사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멋진 커플이었다.

만약 내가 다시 마케도니아엘 가게 된다면 그 이유 중 절반은 라제일 것이다. 다시 만난다면 그나 나나 어설픈 영어로 반가움을 다 표현하지 못해 어색한 웃음부터 짓겠지. 그리곤, 내처 "마시자"와 "라 스트라비아"를 반복해대며 재회의 술잔을 나눌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와 함께 지낸 여름이 다가오니 이런 편지라도 쓰고 싶다.

'그나저나 라제. 요새도 밤마다 친구들과 라키아를 마시고 흥겨운 취기를 에너지 삼아 노래 부르며 살고 있나? 화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늘 웃음 띤 네 얼굴이 가끔 그립다. 마케도니아의 자랑 라키아만이야 못하겠지만, 네가 한번은 꼭 마시고 싶다던 한국 소주 몇 병 배낭에 넣고 다시 그곳으로 갈 날을 기다리며 나, 이곳에서의 팍팍한 삶을 견디고 있다. 네 곁에도 생을 견딜 무엇인가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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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몰코스키. 그가 운영하는 와이너리에 또 가보고 싶다. ⓒ 홍성식


그리고, 기억 속에 남은 또 다른 친구들

라제와 알리나, 미리엄과 함께 한번은 언급해야 할 친구들이 또 있다. 마케도니아 오리드 써니레이크 호스텔의 유쾌한 젊은 주인 지코 스파세스키. 그 역시 록음악 마니아였다. 유럽에 록페스티벌 시즌이 되면 호스텔을 친구에게 맡기고 사나흘씩 페스티벌이 펼쳐지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나 불가리아 소피아로 달려가 놀다온다.

빡빡 밀어놓은 머리에 바리톤의 굵직한 음성 등 하드웨어로 봐서는 '극우 파시스트' 같으나, 사실은 더할 나위 없는 휴머니스트. 호스텔에 1개월 쯤을 머문 내게 숙박료를 파격적으로 30% 이상 할인해줬다. 그 할인은 비단 내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도 사실은 임대한 건물에서 힘겹게 숙박업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마음 씀씀이가 따뜻하고 컸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들었던 내가 "Why?"라며 큰 폭의 할인 이유를 묻자, "Why not?"이라는 쿨한 반문을 들려준 사나이. 결국은 그가 제시한 할인된 숙박료를 전하며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코도 이제 서른이 됐을 것이다. 180cm의 이르는 키에 매력적인 내면까지 갖춘 그에게도 애인이 생겼겠지?

알렉산더 몰코스키 역시 잊을 수 없다. 도시 외곽에서 조그만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 앙드레 말로를 포함한 프랑스의 작가들이 즐겨 태웠다는 골루아즈(Gauloises)를 하루에 2갑 태우는 헤비 스모커. 그는 자신이 직접 빚은 몇 병 되지 않는 귀한 포도주에 서명까지 해서 내게 선물했다.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의 영향이 골고루 반영된 잘 생긴 얼굴. 다음 번 방문할 때는 골루아즈 못지않은 한국 담배 한 보루를 사다줄 생각이다.

편견과 선입견 즉, 인식의 색맹을 깨준 친구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상관일까. 내 좁은 인식의 저변을 시원스레 넓혀준 어린 스승들을 만나러 또 배낭을 메고 길 위로 나서고 싶다. 짧지만 선명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 살고 있는 마케도니아 오리드. 그곳이 내 마음 안에 그려진 새로운 여행의 경유지 중 하나임을 더 말해 무엇할까.
#마케도니아 #오리드 #국적을 넘은 친구들 #라제 파마코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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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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