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던 수영이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35] <하루살이>

등록 2013.06.06 12:28수정 2013.06.06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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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손을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 있는 보람이란 이것뿐이라고―
하루살이의 광무(狂舞)여

하루살이는 지금 나의 일을 방해한다
―나는 확실히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
하루살이의 유희(遊戱)여


너의 모습과 너의 몸짓은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러우냐
소리없이 기고 소리없이 날으다가
되돌아오고 되돌아가는 무수한 하루살이
―그러나 나의 머리 위의 천장에서는 너의 소리가 들린다―
하루살이의 반복(反覆)이여

불옆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벽을 사랑하는 하루살이여
감정을 잊어버린 시인에게로
모여드는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나의 시각(視覺)을 쉬이게 하라―
하루살이의 황홀(恍惚)이여
(1957)

수영 부부가 서강 언덕에서 시작한 양계는 집안 생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자는 뜻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수영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전업 작가', 또는 '프리랜서 번역가'였습니다. 시 쓰기나 번역하기 외에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창작과 번역 수입만으로 살아가는 작가와 번역가들은 늘 돈에 쪼들렸습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중반은 전후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더 심했겠지요.

양계를 시작한 후 수영 부부는 나름대로 정말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특히 수영은 가장의 책임감 같은 것을 생각하며 더 많이 땀을 흘리려고 애썼습니다. 어엿한 직장에 다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글쓰기를 통해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수영이 느꼈을 자괴감은 더욱 컸습니다.

수영은 그 전에는 자주 나가던 명동 거리에도 발길을 거의 끊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명동은 '도라무깡' 술탁이 있는 술집에 앉아 연탄불에 구운 곱창을 안주로 소주를 털어넣는 맛이 일품인 곳이었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 궂은 날에 친구 유정이 명동으로 가 소주나 한잔 하자며 이끄는 경우가 아니면, 수영은 서강 언덕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시내에도 일 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수영이 두문불출하다시피 하게 된 건 양계 일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애증'의 벗이었던 박인환의 죽음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인환은 세탁소에 맡긴 코트를 찾을 돈이 없어 벌벌 떨며 다방을 전전하다가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대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이치고는 비극적인 종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인환의 죽음 이후, 명동은 수영에게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 흔적처럼 남아 있는 곳이 돼버렸습니다.

수영은 집에서 쉴 새 없이 몸을 놀렸습니다. 명동이나 시내를 나가지 않는 날에는 집에서 닭모이를 주거나 토끼를 치고 채소를 길렀습니다. 그렇게 짐승과 채소를 정성들여 돌보거나 글을 쓰고, 이런 일들마저도 하지 않을 때는 들판을 거닐었습니다. 수영의 노모가 "그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해서 그렇지 게으른 사람은 아니야"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지런함 속에서 이어가는 일상이 늘 평안함만을 주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특별한 일 없이 굴러가는 일상 그 자체가 문제될 까닭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일상이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그런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어떤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을 때 생깁니다. 쳇바퀴 돌아가듯 굴러가는 일상의 현실이 지지부진하면 상황이 더 심각해집니다.

무엇보다 양계를 통해서 얻는 수입이 수영 부부가 부지런히 일한 보람을 전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폭등하는 사료값에 비해 달걀과 닭값은 늘 제자리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료를 구하거나 달걀과 닭은 파는 일 모두가 무척 힘들었다는 점입니다. ≪김수영 평전≫에서는 당시 사료와 달걀의 공급과 수요를 대부분 주한미군이 쥐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료값은 계속 올리면서 달걀값은 본국 가격이 고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몇 년 동안 십 원 한 장 올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양계 비용은 오르는데 수익은 떨어지는 역전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백이 생긴 수입분을 메우기 위해 수영은 더욱 더 번역에 매진했습니다. 수영이 에머슨의 논문집을 번역하다가 과로로 쓰러진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습니다. 아내 현경은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수영에게 "몇 달만 고생합시다. 닭이 알을 많이 낳게 되면 당신도 그 지긋지긋한 원고료 벌이를 하지 않아도 돼요" 하고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수영은 아내의 그런 말이 절실하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이 타개될 가능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수영으로서는 그저 묵묵히 글을 쓰고 짐승을 기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그 스스로 힘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이 시의 화자가 바로 이러한 수영의 모습을 정확하게 입체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일손을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1연 1행)합니다. "살아 있는 보람이란 이것뿐"(1연 2행)이라고. 그러면서 화자는 머리 위에서 어지럽게 나는 "하루살이의 광무(狂舞)"(1연 3행)와 '유희'(2연 3행)를 바라봅니다. 그 "무수한 하루살이"(3연 4행)는 "소리없이 기고 소리없이 날다가 / 되돌아오고 되돌아가"(3연 3, 4행)며 '반복'(3연 6행)합니다. 수영은 그런 '하루살이'의 모습을 보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런지요.

하지만 수영은 곧 시선을 바꿉니다. "불 옆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4연 1행)의 열정을 본 것일까요. 그 자신을 "감정을 잊어버린 시인"(4연 3행)으로 규정해 놓은 화자에게 '하루살이'는 거듭거듭 모여듭니다. 그것을 보면서 화자가 외칩니다.

"나의 시각을 쉬게 하라."

이때 수영에게 '하루살이'는 하나의 '황홀'(4연 6행)이었습니다. 수영은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지쳐 있었습니다. "감정을 잊어버"렸다는 진술이 그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하루살이'는 그런 수영을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게 위로해 줍니다. "불옆으로 모여"(4연 1행)들어 자신의 몸을 태워가면서 말입니다. 수영은 시인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어떤 뜨거운 감정 같은 것을 '하루살이'의 격렬한 날갯짓에서 보았던 게 아닐런지요. 그것은 수영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안일과 나태에 빠진 자신을 향한 뜨거운 채찍질이기도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루살이>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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