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지나간 러시아에서 재회한 '옛 연인'

[시베리아 이별여행④] 무조건 그를 반박하던 나... '혁명 도시'라서 그랬나

등록 2013.06.07 13:40수정 2013.07.0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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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타이타닉 커플의 10년 후'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클릭을 해보니 영화 <타이타닉>에서 세기의 사랑을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두 배우가 <타이타닉>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연인의 한을 풀듯 10년 만에 나란히 부부 역으로 캐스팅 된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한 장면이었다. 물론 두 영화는 서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작품이다. 하지만 죽음을 넘을 만큼 위대한 사랑도, 결혼하고 나니 매일 부딪혀야 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서로의 삶과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물건을 내던지면서까지 싸우는 그들의 영상 아래로 <타이타닉>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씁쓸한 댓글이 달렸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한 대신 원작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찾아 읽었다. '혁명의 길'이라는 뜻의 책 제목은 주인공 프랭크와 에이프릴 부부가 사는 집이 있는 거리 이름이기도 하다. 이들 부부는 한때 자유분방한 젊은이들로서 도시의 더러운 단칸방에서 예술을 논하며 살았다. 하지만 에이프릴이 임신하면서 프랭크는 취직을 했다. 그후 둘은 교외에 이사를 온다.


처음 직장을 잡을 때 프랭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바라는 건 단지 우리가 내년쯤까지 생활을 꾸려나갈 정도의 돈이 들어와 주는 거야. 내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지. 그러는 동안 나는 내 고유의 정체성을 그대로 지켜가고 싶어. 그러니까 '흥미롭다'고 간주될 만한 일자리는 무조건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중략) 가령 이런 거지. 날마다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내 몸과 대학생다운 미소는 가져가도 좋다, 그 대신 그만큼의 돈을 주면 된다, 그런데 그 이상은 피차간 철저하게 간섭하지 않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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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 시내의 '꺼지지 않는 불'. 멀리 레닌의 흉부상도 보인다 ⓒ 예주연


사회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작은 혁명을 꿈꾸었던 이 젊은 부부. 어느 날 그들도 남들과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혁명의 길' 위의 삶이라기엔 너무나 단조롭고 평범한 중산층의 삶 말이다. 권태에 빠진 부부는 싸움을 계속하고, 그 끝으로 향한다. 물론 싸움 끝에는 큰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 6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리로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언뜻 넉넉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욕망하고 같은 삶을 살도록 조장하는 광고와 매스미디어가 있었다. 이 시기의 미국은 구세대적 권위에 저항하고 다원성을 주창한 68혁명과 베트남전 반전시위가 일어나고 히피들이 등장하기 직전이었다.

위 소설이 자본주의의 이면을 그렸다면 공산주의 혁명을 이룬 러시아는 어땠을까.


러시아 여행을 앞두고 <닥터 지바고>를 다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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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눈보라를 만나 옷을 여미고 있다. 옛 연인을 재회한 가슴이 눈보라만큼 소용돌이쳤다. ⓒ 예주연


이번 여행을 앞두고 나는 오래 전 읽은 <닥터 지바고>를 다시 꺼내 펼쳤다. 시간이 없어서 줄거리 중심으로 훑어봐서인지 언뜻 격변하는 시대 배경과 동떨어진 나약한 이들의 그저 그런 불륜 이야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주인공 라라를 러시아 자체로 보자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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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화된 <닥터 지바고>. ⓒ 필름

라라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상류층 인사인 코마로프스키에게 유린당하고 버려진다. 그 후 어릴 적부터 자신을 동경해왔던 안티포프와 결혼하는데, 이 열혈청년은 라라의 부정했던 과거를 견디지 못하고 한창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던 러시아군에 자원입대해 버린다.

러시아군은 곧 세계대전에서 빠지지만, 볼셰비키 적군과 왕당파 백군의 내전이 이어지고, 안티포프는 무시무시한 적군의 대장이 되었다는 풍문만 들려올 뿐,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다. 이때 라라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가 바로 지바고이다.

지바고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의사다. 시를 쓰며 어머니의 유품인 발랄라이카(러시아 전통 현악악기)를 소중히 하는 예술가이기도 하고, 혁명 후 시골에 내려가 땅을 일구는 농부이기도 하다. 소설의 저자인 파스테르나크 자신이 의사이자 작가이기에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세대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당의 구호만을 절대시하던 비인간적인 시대에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가치들-예컨대 세계를 바꾸겠다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땀 흘리는 일상, 이념을 뛰어넘는 생명의 소중함,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예술의 의의 같은 것들-말이다. 각자 배우자와 생이별을 한 라라와 지바고 사이의 사랑도 자아비판과 밀고 시스템으로 개인감정과 가족 같은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하려 했던 당과 이념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티포프는 당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져 라라와 재회 못한 채 죽는다. 지바고도 라라와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는데, 지바고가 라라를 그녀의 안전을 위해 함께 떠나보내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코마로프스키다. 그는 혁명의 타도 대상인 부패한 부르주아였으나 기회주의적 행동으로 혁명 정부에서도 한자리를 꿰찬 것이다. 순수했던 이상의 실현 대신 독재로 변질되었다 결국 무너진 소비에트를 떠올리는 대목이다.

소비에트가 해체된 지 20여년이 흐른 지금, 러시아는 아직 혼란스러워 보였다.

외국인 여행자들을 번거롭게 하는 비자 초청장과 거주신고 등 공산주의 잔재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자본주의 정부, 코마로프스키 같이 재빠르게 적응한 이들이 나라의 부와 권력을 차지하는 동안 예전보다 못한 삶을 사는 대다수의 국민들, 그 속에서 그들이 의지하는 종교….

상트페테르부르크, 늠름한 자태에도 불구하고 왠지 쓸쓸한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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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성당. 성모 마리아에게 축원을 비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 예주연


언제부턴가 관광객 외에는 잘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린 유럽의 오래된 성당들과 달리 러시아 정교회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축원을 비는 줄이 길게 늘어선 등 신실한 신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산주의 체재 아래 종교가 오랫동안 금지되었기에 그 반동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도시나 중심광장에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교회와 이들을 억압했던, 그러나 이제는 힘을 잃은 혁명의 상징물들이 함께 놓여 있곤 했다. 레닌의 동상이나 혁명전쟁에서 죽어간 이름 없는 용사들을 기리고 러시아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는 '꺼지지 않는 불' 같은 것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한 신혼부부가 소비에트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대로 '꺼지지 않는 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이르쿠츠크에서는 불을 지키는 군인들이 교대행진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함박웃음과 늠름한 자태에도 불구하고 왠지 쓸쓸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우리가 있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이라는 혁명의 불은 꺼지고 재 같은 찌꺼기 감정만을 가진 S와 나.

각자 나라에서 러시아 여행을 준비하다 계획이 틀어지면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5년을 정리하기에 먼 거리는 한계가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겨우 값비싼 국제전화를 걸어놓고는 그의 숨소리만 들으며 한참을 울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 여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만나기만 한다면 얼굴을 맞대고 밤새도록 모든 걸 다 얘기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걸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이란 환상일 뿐이었다.

처음 와 본 나라에서 관광을 겸해야 했기에 우리의 신경은 바짝 곤두서 있었다. 첫날 상트페테르부르크 날씨는 양호했지만 러시아의 겨울은 역시 러시아 겨울이었다. 거기다 물가가 비싸서 특히 카페나 레스토랑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해 아무데나 들어가 몸을 녹일 수도 없었다. 우리는 한 관광지에서 다른 관광지까지 쉬지 않고 옮겨 다녔다.

길을 찾으면서도 길보다는 서로에게서 시빗거리를 먼저 찾아내 말다툼을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길바닥,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한참을 대치하기도 했다. 어렵게 닿은 관광지에서는 서로를 모른 척 따로 구경을 하고 나왔다. 겨우 시간을 내 자리를 잡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앉자마자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고, 상대는 쉬지 않고 그것을 반박했다.

내 행동에 대한 그의 말에 순간 말을 잃고...

한때 내가 내 안에 있는 생각들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표현한다고 느꼈던, 경외심을 가지고 들었던 그의 말들이 다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흥분해서 과장된 표정을 짓는 것도, 얼굴을 흔들어대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급기야 나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기에 이르렀다. 그런 나에게 S가 말했다.

"내가 지금 너를 달래려 한다면 너는 짜증을 내겠지. 물론 잠자코 있는다 해도 마찬가지겠지만."

다시 아니라고 무조건 반박해야 했지만, 나는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러시아에서 S를 만난 이후로 나는 계속 괜한 트집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풀어달라고…. 하지만 S는 더 이상 나를 무조건 이해해야 하는 또는 내 식으로 맞춰야 하는 내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인지하자 그의 사소한 단점들 대신 그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비에트가 무너지면서 공산주의는 실패라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붉은 광장엔 여전히 레닌의 묘가 있으며, 도시마다 최고 중심거리 이름은 마르크스다. 스탈린의 과오는 척결하면서도 볼셰비키 혁명의 역사와 마르크스 사상은 존중하는 것이다. 나도 찌꺼기 감정을 털고 S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그와의 사랑을 추억으로 묻을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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