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레 이 순간을 평생 닞지 안카시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24) # 7. 약속 ①

등록 2013.08.07 15:48수정 2013.08.0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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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마을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전선으로 가는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1950. 7. 29.) ⓒ NARA


# 7. 약속

포성


"펑 펑, …꽝 꽝…."

다시 유학산 쪽에서 포성이 울렸다. 준기와 순희가 번갈아 돗자리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낙동강 건너 유학산 산등성이에서 흰 화약먼지가 몰씬몰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학산 너머 남쪽 다부동 유엔군 측 진지에서 쏜 곡사포 포탄이 유학산 일대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유학산 일대를 아주 박살낼 모양이에요."
"기러나 봅네다. 뭔 폭탄이 기러케두 많은디 이러다 아예 조선반도를 덮겠수다."

준기는 바깥 섬돌에 벗어둔 그들의 신발을 다시 방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는 방 밖에서 들어오는 빛조차도 모두 가렸다. 그러자 방 안이 동굴처럼 컴컴해졌다.

"꽝…."


야포의 포탄이 빗날아온 탓인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폭발하는 듯했다.

"으악!…"


그 순간 순희는 비명을 지르며 준기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서로 껴안은 채 행랑채 컴컴한 방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펑 펑, …꽝 꽝…."

곧 집이 흔들리는 듯한, 고막이 찢어질 듯한 큰 폭음이 계속 울렸다. 두 사람은 엎드려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10여 분간 지속되던 야포의 포탄 폭발소리가 점차 멎었다. 그 소리가 딱 그치자 순희는 준기의 곁을 벗어나 바로 누웠다.

"동생, 고마웠소."
"……."

그런데 준기는 아무 대꾸도 없이 끙끙 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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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폭포 금강산 구룡폭포. 한 시인은 '사람이 몇 생을 거듭나고 죽어야 금강의 물이 되는가'라고 금강의 맑고 깨끗함을 예찬했다(2006. 9. 27.). ⓒ 박도


동생? 어디 아파?

"동생? 어디 아파?"
"……."

순희는 깜짝 놀라 일어나 머리맡 양푼의 물에 수건을 적셔 준기의 이마를 훔쳐주었다. 그래도 준기는 계속 끙끙 앓기만 했다.

"동생, 어디가 아파?"
"…머리도, …가슴도 답답하구…."
"어쩌나 비상약도 없고…."

준기의 앓는 소리는 점차 커갔다. 그러자 순희는 준기에게 다가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러자 준기의 앓는 소리가 점차 잦아지고 대신 준기의 가슴 맥박이 더욱 요동쳤다.

그제야 순희는 준기의 속마음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준기를 다시 껴안았다. 준기는 눈을 감은 채 슬그머니 순희의 가슴을 더듬었다.

"바보처럼 아무 말도 않고 혼자 끙끙 앓기는…."
"……."

순희는 준기를 껴안은 채 다독였다. 준기에게 순희의 품은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짜릿한 황홀함도 있었다.

"동생, 나빠."

순희는 그 말을 뱉으면서도 준기의 머리를 꼭 얼싸 안았다. 순희의 얼굴도 준기처럼 발그레 상기되고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더니 곧 가벼운 신음으로 변했다.

"음… 음…,  동생,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순희는 자기 몸을 더듬는 준기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러자 준기는 끙 끙 신음소리를 냈고 맥박이 요동쳤다.

"누이, 정말 미티가서."
"안 돼. 그만!"

순희는 매몰차게 준기를 밀쳤다. 그 순간 준기는 온 몸에 경련이 일면서 다시 끙끙 앓았다. 

"누이, 정말 미티가서."
"정말?"
"……."

준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더 큰소리로 끙끙 앓았다. 순희가 준기의 이마를 다시 짚었다. 펄펄 열이 끓어올랐다.

"이만 일로 예서…. 동생이 미쳐서는 안 돼. 우린 집으로 꼭 돌아가야 해. 사실 난 동생 때문에 살아난 거지. 이 세상 그 무엇인들 아깝겠어."
"누이, 덩말 고맙수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어. '여자는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목숨이고, 그 다음은 정조'라고. 동생이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까 나는 그 무엇을 줘도 아깝지도 않아."
"누이 거(그) 말조차도 날 더욱 미티게 하누만…. 내레 오늘 이 순간은 평생 닞지 안카시우."
"동생, 나도 그럴 거야."

준기는 슬그머니 속바지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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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오대산 월정사 언저리의 들꽃(2013. 8. 5.). ⓒ 박도


태초의 생명소리

"아! 아… 아…."

순희는 경련과 함께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준기의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태초의 생명 소리가 이어졌다.

곧 그들은 서투른 뱃사공처럼 천천히 열락의 강을 삐거덕 삐거덕 노 저어갔다. 점차 그들의 노 젓는 소리가 차츰 가빠갔다. 두 사람은 소나기를 맞은 듯 비지땀을 흘리면서 깊은 바다로 계속 잠수해 갔다.

그 시간 행랑채 언저리 매미들이 가는 여름을 아쉬워 발악하듯 울어댔다. 멀리서 '쿵 쿵' 하는 대포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곧이어 미군 폭격기의 '펑, 펑' 하는 폭탄투하 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순희는 다시 준기 가슴에 묻었다.

전투기의 마지막 폭격소리에 그들도 함께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쳤다. 그들의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순희는 젖은 수건으로 다시 준기의 이마와 앞가슴의 땀을 훔치며 준기를 흐뭇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아파?"
"…."

준기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누이는 훌눙한 간호전사야요? 어드러케 사람의 마음도 기러케도 잘 읽수? "
"뭐라고?"
"누이는 내레 병을 단박에 고쳐주는 천사입네다. 고맙습네다. 내레 이데 죽어두 돟수."
"동생, 여기서 죽어선 안 돼. 어쨌든 우린 각자 집으로 가야 해."
"알가시오."

그 말에 준기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순희가 먼저 옷을 입고는 우물가로 가서 몸을 닦고 왔다. 곧 이어 준기도 우물가로 갔다.

준기는 우물에서 길어 올린 두레박 물을 머리 위에서 쏟았다. 샘물이 그렇게 상쾌하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컴컴한 방 안에 나란히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행랑채 가죽나무의 매미들은 계속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듯 울부짖었다. 늦은 여름날 오후는 그렇게 시나브로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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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껍질들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야포의 포탄껍질들(1951. 9. 6.). ⓒ NARA


갈증

준기는 심한 갈증에 잠이 깼다. 윗목 양푼의 물을 엎드려 짐승처럼 마셨다. 그 소리에 순희도 잠에서 깼다. 순희도 다가와 짐승처럼 엎드려 양푼의 물을 마셨다. 그 많던 양푼의 물이 바닥났다.

"물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덩말 기러네요."
"준기 동생, 꿰맨 자리 아프지 않았어요?"
"누이가 잘 꿰매준 탓에 일없구만요."
"다행이에요. 조금 전에 동생이 하도 안간힘을 쓰기에 덧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어요."
"아, 누구 솜씬데…."

두 사람은 준기의 아랫배 꿰맨 자국을 번갈아 만지면서 싱긋 웃었다.

"유학산이 아주 박살이 난 건 아닐까요?"
"길쎄 …."
"거기서 얼마나 살아남을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에요?"
"우리 인민을 위한 전쟁은 아니디. 미소의 전쟁노름에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놀아나고 있수다. 북남 지도자들이 분단문제를 정치적으로 풀디 못하고 무력으로 풀레고 한 결과디. 해방 후 인민들 사이에 한때 누행터럼(유행처럼) 번졌던 '소련에 속디 말고, 미국 믿디 말고, 조선사람 조심하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우."
"그래요. 아무튼 이 모두가 힘없는 나라 인민들의 슬픔이지요."
"우리나라가 약소국이 된 것은 거(그) 일차로 우리 인민에게 책임이 이시오(있어요). 세상이 변해가는 데도 미련스럽게 옛날 방식 그대로 살다가 남의 나라 식민디가 된 거디. 찰스 다윈이 그랬다디요. '살아남는 종은 가장 강한 종도, 가장 지능이 우수한 종도 아닌, 변화에 가장 빠른 종일뿐이다'라구."
"동생, 상당히 유식하오. 학교에서 공부 잘 했나 보죠."
"머이. 기저 해마다 우등상은 빠트리디 않았디."
"그래요? 동생이 자랑스럽구먼요. 지난 세월 우리 인민들이 미련스럽게 살았다는 동생의 그 말은 맞아요. 조선 오백 년 동안 백성들의 의식주 생활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지요. 서양은 증기기관차를 타거나 기선을 타고 다니는데, 우리는 기껏 가마나 말, 돛단배를 타는 정도였지요. 그런데다가 세상 사람의 반인 여성의 인권을 전혀 무시했지요."
"기랫디."
"근데, 저 혼자였다면 다부동 유학산전선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거예요."
"나두 마찬가지디. 어드러케 거기를 감히 나 혼자 도망테(도망쳐) 올 수 있갓수(있겠소)? 누이 아니믄 기런 생각두 못 했디."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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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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