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 핀 한 송이 순애보로군"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38) # 11. 체포 ③

등록 2013.09.01 09:13수정 2013.09.0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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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으로 불바다가 된 산하(1953. 1. 11.). ⓒ NARA, 눈빛출판사


날 따라 오라

그새 날이 어두웠다.


"김 동무, 이 부근에 트(아지트, 은신처)라두 마련해서?" 
"아닙네다. 내레 첫 길이야요."
"기럼, 날 따라 오라. 내레 디금 보투(보급투쟁)갔다 트로 돌아가는 길인데 거기가면 김 동무 아는 사람두 있을 거야."
"네에?"
"가서 보믄 누군디 알거야."
"……."

준기는 매우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기래 최순희 거 간나 동무완 어드러케 된 거디?"
"추풍넝에서 헤어뎃어요."
"김 동무가 거 여우 같은 간나한테 채엿나 보군."
"기게 아니구, 내레 최 동무의 무사 귀가를 위하여 몰래 도망 와시우."
"메라구?"
"내레 최 동무를 진덩으로 사랑하기에…."
"머이?"
"이듬엔 전시라 남너(남녀)가 항께 도망하는 게 아두 불펜하더만요. 기래 내레 몰래 최 동무를 위해 슬며시 떠나와시오."

"전쟁터에 핀 한 송이 순애보로군."
"………."
"역시 김 동무는 펭안도 넹벤 순정파 청넌이야."
"……."
"기래? 둘이서 다시 만날 약속은 햇나?"
"네. 전쟁이 끝난 뒤, 8월 15일 낮 12시,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만나자고."
"얼씨구 무슨 춘향이 이도렁 같은 네기로구만. 긴데 하긴 해서?"
"………."

"야, 솔딕히 사내답게 말하라. 내레 산전수전 다 겪은지라 이미 다 아는 네기디만."
"낙동강을 건넌 이튿날 구미 형곡동 한 행낭채에서 한낮에…."
"히히, 잘 햇다야. 이데 죽어두 둘 다 처네귀신 총각귀신은 면햇구먼."
"………."
"긴데 사내가 말뚝을 박을 땐 확실하게 박아야디. 기러치 않으믄 계집이란 튀게 마련이디."
"내레 순희 동무가 꿰맨 뱃가죽이 아프도록 박앗구만요."
"기거 잘 햇다야. 기럼, 거 간나 여간내기가 아냐. 내레 허벅지에서 파편 꺼내는 솜씨도, 장 상사 찢어진 귀를 봉합하는 솜씨도 돟구. 살짝 웃으면 보조개가 패는 게 아주 사내들 간장을 죽여주디. 내레 그 간나 말 믿구 사과서리 허락했다가 견책 먹었디. 김정동 연대장님과 리영호  사단장님께서 내레 독던대장으루 워낙 신임햇기에 망덩이디 근무태만으루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 해서야."
"기러셨구만요."


물고기와 물

"열 길 물 속은 알아두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말을 내레 기때 멩심햇디. 아무튼 김 동무도 살아가믄서 계집 조심하라구. 사내가 함부로 계집들 구멍 찾다가 신세 조디는 일이 수태 많아. 아두 구멍 찾다가 총이나 칼맞구 뒈디는 놈도 있디."
"알쾌줘서 고맙습네다."
"하지만 여성을 진정으로 동등하게 대하면 기런 일은 당하디 않을 게야. 세상엔 인구의 절반이 여성 아냐. 건데 봉건사회에서는 여성을 집안에만 가둬 두고 그들의 힘을 썩혔디. 우리 조선이 망한 리유도 거기에두 있디. 게다가 전시 때는 여성을 정신대니 위안부니 하는 허울 돟은 이름으루 강제로 잡아다가 한낱 성 노리개를 썼디. 일본군대나 장개석군대가 그 짓하다가 벼락 맞구 망했잖아. 지금두 미데 놈들이나 국방군 놈 가운데는 여성들을 한낱 성 노리개로 여기거나 부너자를 겁탈하는 놈들이 많아. 특히 국방군 중 일군이나 만군 출신들은 아딕도 지 버릇 개주디 못한 놈들이 수태 많아. 대동아전쟁 때 걔네들은 위안소를 부대 밖에 만들어 놓구 한 여성에게 수십 명씩 달겨들게 하였디. 짐승도 기러진 않았디. 우리 조선 여성 가운데는 순딘하게도 군수공장에 가는 줄 알고 가서 기렇게 성노예가 된 여성들이 많아서."


"내레 살았던 구당동에두 정신대로 끌려 나간 여성들이 있었디요."
"일제 아새끼들은 조선 팔도, 만주 전역에서 반반한 처네들을 군수공장에 보낸다며 붙잡아 거디반 위안부로 보냇디. 내레 디난 9월 1일부터 독전대장직을 그만 두고 국방군 포로신문관을 후퇴 명넝이 내릴 때까디 한 20일 남딧했디. 근데, 어느 하루 투항해 온 자가 국방군 고급 장교로 만군 출신인 정 아무갠가 장 아무개 당번병이었대. 거 자 말이 자기 직속상관은 전선에서두 하룻밤도 혼자 자는 법이 없었대. 매일 잠자리를 같이할 부너자들을 직접 조달하는데 기게 사람의 탈을 쓰구 할 짓이 아니라 부대를 뛰쳐 나왔다고 하더군. 투항자의 말이라 백 프로 믿을 수는 없디만, 어느 정도는 사실일 거야. 특히 일군이나 만군 출신 걔네들은 배꼽 아래는 서로 상관치 않는다고 할 정도로 성추행이나 부녀자의 강간, 겁탈 등이 몹시 심했디."
"기래서 걔네들이 지나간 곳은 남아나는 게 없다는 말두 생겨낫구만요."

"기럼, 애초 중국 인민해방군이 장개석 국부군의 1/10 정도로 군사력이 절대 열세였디만 마침내 이긴 것은 무엇보다 모택동 주석의 교시 탓이었디.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알가습네다. 대장 동무."
"너덜은 남남북너가 아닌, 북남남너가 만나서 서로 연애하구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면 기게 남북통일이야. 아무튼 김 동무가 최 동무를 꼭 만나 거 과업을 이루라." 
"말씀 고맙습네다."
"긴데, 이 전쟁이 어드러케 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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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상원사 길 동피골 계곡(2013. 8. 5.). ⓒ 박도


동피골 계곡

남 대장이 앞장서고 김준기는 뒤따랐다. 그들은 월정사를 우회한 뒤 상원사 쪽 골짜기로 올라갔다. 남 중사는 성큼성큼 걸음을 떼는데 준기는 뒤따르기가 힘에 부쳤다.

"어드러케 걸음이 기러케 빠릅네까?" 
"내레 백두산을 오르내릴 때 닉힌 거디. 거기는 일본군 토벌대 아새끼들이 근접치 못햇디."

그는 백두산과 두만강 일대에서 활약했던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해방 후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입북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한 역전의 노장이었다. 남 대장이 멈춘 곳은 동피골 계곡 중간 지점에 있는 천연동굴이었다. 준기가 그곳에 이르자 윤성오 상등병이 아주 반겨 맞았다.

"인연이란 참 무섭구만, 이러케 오대산 산중에서 또 만나다니…."
"면목없구만요."
"사실은 내레 기때(그때) 섭섭했던 건 사실이야. 동무들이 사과를 한 보따리 가지고 돌아오길 눈이 빠디게 기대렛디. 이튿날 새벽까디 소식이 없어 국방군 아새끼들한테 붙들리디 않았으믄 도망질한 걸로 리해햇디."
"용케 네(예)까디 후퇴하셋구만요."
"내레 남 대장 동무 때문에 예끼디 살아왓디. 매가두(맥아더)란 놈이 인천상눅(인천상륙)인가 하고 난 뒤부터는 국방군 아새끼들의 눈빛이 달라뎃어. 기래 기때부터 전선이 밀리는데 9월 23일인가 후퇴 명넝이 떨어젯디. 기래 나두 후퇴 길에 나섯는데 남 대장 동무레 대열에서 낙오한 나를 요기까지 이끌어 주시더만. 내레 부상병이라구 강원도 평창까디는 반 이상은 도락구를 갈아 타믄서 용케 네까디 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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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동피골 계곡, 정상(호령봉)으로 가는 숲길이다(2013. 8. 5.). ⓒ 박도


윤성오

윤성오 상등병은 그때까지도 조금 절룩거렸다.

"다덜 귀하구 아까운 사람들이디만 윤 동무는 더욱 아까운 인물이야요. 아는 것두 무턱 많구 판단도 총멩(총명)하구 … 꼭 살아서 돌아가 올곧은 교육자루 조국건설에 이바디할 일꾼들을 많이 길러내야 할 인물이디."

남 대장이 윤성오 상등병을 추켜세웠다.

"부상다를 살려줘서 고맙습네다."

윤 상등병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게 내 임무였디."

남 대장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아넵네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요. 우리를 살레줘 고맙습네다."

준기가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야, 일어나라. 김 동무를 살레줘야 나중에 국수 한 그릇 얻어 먹디."

남 대장의 말에 윤성오 상등병도 한 마디했다.

"기때 나도 한 그릇…."
"기 날이 온다믄 곱빼기로 두 그릇을 드려야디요."
"돟아서 우리 살아서 거 혼인잔치에 꼭 가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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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시레이션 상자를 살며시 들여다 보고 있다(진주, 1950. 9. 30.). ⓒ NARA, 눈빛출판사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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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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