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때 거기서라믄 발쎄 총알이 니 심장을 뚫었을 기야"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37) # 11. 체포 ②

등록 2013.08.30 10:49수정 2013.08.3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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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을 지급 받고자 윗옷을 벗고 대기 중인 인민군 포로들. 그들 목걸이에는 각자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인천, 1950. 10. 2.). ⓒ NARA, 눈빛출판사


금가락지

준기는 먼 길을 떠나자면 비상식량과 돈이 꼭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순간 준기는 순희 누이가 준 금가락지가 떠올랐다. 준기는 사랑으로 건너온 뒤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말하고 금가락지 파는 일을 부탁드렸다.


"어르신, 이 가락지를 팔아 양식도 사고, 비상금을 마련하고 싶습네다."
"알았다. 오늘이 마침 상주 장이다. 조금 있다가 내하고 장에 가자."
"고맙습네다."
"마, 자네를 본께 내 막둥이 생각난다. 그 놈아가 지금 어데서 지내고 있는지? 이름이나 알아둬라. 조석봉이다. 하늘에 방맹이 매단 얘기지만 혹 오다가다 만나거든 이미애비(어미아비)가 집에서 마이 기다린다고, 어짜든동 살아 돌아오라고 꼭 전해 도."
"기러디요."

순간 준기는 곰곰 생각해 보니 자기가 장날 장터에 가는 게 위험스럽게 여겨졌다. 거기에 가면 아무래도 군경에게 거동수상자로 붙잡힐 것만 같았다.

"어르신, 내레 장에 가디 안카시오."
"와, 그새 맴이 변했나?"
"기게 아니고, 붙잡힐 것 같아…. 그냥 어르신 혼자 다녀오시라요."
"마, 알겠다. 잘 생각했다. 요샌 장에도 군인들과 경찰들이 좍 깔려있을 기다."

준기는 주머니속의 금가락지 묶은 실을 이빨로 뜯어낸 뒤 노인에게 건넸다. 그런 뒤 그것을 팔아 겨울내복과 겉옷, 그리고 걸망을 만들기 위한 광목과 운동화 등, 필요한 품목을 장에서 살 수 있도록 종이에 낱낱이 적어드렸다.

"내 퍼뜩 장에 다녀올 테니 어디 나댕기지 말고, 자네 신발 방안에 들여놓고 여기서 한잠 푹 자라."
"네. 기러겠시우."


걸망

오후 느지막이 장에 간 노인이 돌아왔다.


"그 금가락지가 두 돈이던데, 한 돈에 만 원씩밖에 안 쳐주더라. 그래 이 만원 받아가지고 자네가 부탁한 것 이것저것 사고 남은 돈이다."

노인은 일만 3천 원을 건넸다. 준기는 일만 원만 받으려고 했다.

"문디 콧구멍에서 마늘을 빼묵지, 내 그 돈 안 받는다."
"기러시면 그 돈만큼 양식을 주시라요."
"마, 알았다. 내 우리 할마이한테 부탁해서 오늘 떠온 광목으로 자네 걸망 만들어 거기다 그 돈만큼 쌀을 넣어주라고 할게. 그 돈은 자네가 우리 할마이한테 직접 조라. 마침 낼 직기사 가는데 쌀 팔아 차비하고 불전 마련할라켔는데, 그 돈으로 하면 되겠다. 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데이."

그날 밤 느지막이 준기는 신곡리 노인 집을 떠났다. 새로 만든 걸망에는 쌀 너 되와 소금, 미숫가루 등 할머니가 챙겨준 비상식량도 담았다.

"어야든동 살아 집에 가서 부모 꼭 만나거래이."
"시상 부모 맴은 다 같을 기다. 꼭 상봉하거라."
"네, 기러디요. 고맙습네다. 안녕히 계시라요."
"우리 아들 이름은 조석봉이다. 단디 기억했다가 혹 만나거든 집에서 어미애비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고 꼭 전해 도."
"알가시오. 영감님에게도 부탁받아시오."
"좋은 세상 만나 다시 우리 집에 와서 내 아들캉 놀면서 마음 편케 하룻밤 자고 갔으면 좋겠다."
"그라이만. 그날이 오면 내 돼지 한 마리 잡고, 술도가 막걸리 두 섬 받아다 동네 잔치할란다."

그날 밤 준기는 신곡리를 떠나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상주 외곽을 거쳐 문경으로 갔고, 거기서 문경 새재를 넘은 뒤, 다시 북동쪽으로 북상했다. 준기는 늘 편한 도로를 걷지 않고 도로 옆 들길이나 산길을 걸었다.

준기는 순희와 추풍령에서 헤어진 뒤 상주, 문경을 거쳐 단양로 갔다. 보름 뒤인 1950년 10월 20일에는 평창을 거쳐 그날 저물 무렵에는 오대산으로 가는 진부삼거리에 이르렀다. 그 사이 같은 처지의 인민군 패주병을 여럿 만나기도 했고, 군경들에게 숱하게 쫓기기도 했다. 그새 새로 산 옷도 해지고 새 운동화도 떨어져 평창에서 다시 사서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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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와 아이들 38선 남쪽 6마일 지점(1951. 5. 28.). ⓒ NARA, 눈빛출판사


외나무다리

준기가 막 진부삼거리를 지나 오대산 월정사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김준기 동무 아냐?"

순간 준기는 귀에 익은 목소리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3사단 독전대장 남진수 중사가 따발총을 어께에 멘 채 준기를 째려보고 있었다.

"야, 이 쌍노무새끼! 와 기러케 놀라나?"
"……"

준기는 쥐가 느닷없이 고양이를 만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우리나라 속담이 아두 기가 막히게 맞디? '웬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
"……"
"뛰어야 베룩이란 말두 있디?"
"……"

준기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대장님, 기더 죽여주시라요."
"야, 일어나라우. 내레 기때 거기서라믄 발쎄 총알이 김 동무의 심장을 뚫었을 기야. 하디만 지금은 피차 쫓기는 처딘데 구지 기러구 싶지 않아."

준기는 여전히 엎드린 채 남 대장에게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야, 날래 일어나라."
"아넵니다. 기더 죽여주시라요."
"야, 개수작하지 말고 날래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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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오대산 들머리 월정사 경내 적광전과 구층탑 ⓒ 박도


다시 만난 독전대장

준기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대로 꿇고 있자 남 대장이 다가와 준기의 상체를 잡아 일으켰다.

"기래, 지금 어데 가는 길이야?"
"넹벤으로 가는 길입네다. 지금 당장은 하룻밤 쉬어갈 곳을 찾으러 가는 중입네다."
"기래? 난 동무가 발쎄 고향에 돌아간 줄 알았디."
"찻길도 끊어디고 큰 길마다 국방군 아새끼들이 좍 깔레있기에…."

"기럼 걔네들한테 투항하디 기랬나?"
"싫터만요."
"기래? 솔직히 나두 한창 쫓길 때는 배두 몹시 고프구 온 천디에 깔린 투항권유문에 눈이 뒤집혀 기걸 손에 든 채 뛰쳐나가구 싶기도 하더만…, 우리 옆 13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도 투항했디. 기래서 내레 상당히 흔들렸디."
"……"

준기는 남 대장의 그 말에 자기 귀를 의심하며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결기가 서려 있었다.

"긴데 어느 하루 국도에서 가까운 어느 오두막에 숨어 문틈으로 막 지나가는 별판을 단 국방군 지프차를 보았디. 근데 앞자리에 앉은 놈을 보니까 많이 닉은 얼굴이더구만. 기래 한참 기억을 더듬자 바로 거 놈이 김아무개 아니믄, 백아무개였을 거야. 내레 왜정 시절 만주 간도성 일대에서 항일하며 위만군(僞滿軍, 괴뢰만주군의 별칭) 아새끼들과 여러 번 싸웠댔디. 그때 만났던 간도특설대 거 악딜 사냥개여서. 거 순간부터 내레 투항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다더만."
"네에? 간도특설대라니요?"
"저기 숲속 바위에서 좀 쉬디가 갈까?"

"돟습네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길가 바위에 앉았다. 남 대장은 바위에 걸터 앉고는 주머니에서 담배가루를 꺼내 종이에 말아 침으로 붙이고서는 부딧돌로 불을 붙였다.

"이젠 담배도 떨어지구 이 참에 끊어야겠어. 밤중에는 담뱃불이 십리밖에서두 보이고, 거 냄새도 오리 밖까디 난다더만. 내레 이젠 담배 살 돈두 없구."
"내레 비상금이 몇 푼 있습네다."
"거만 돼서. 함부루 담배 사러가다가는 국방군 사냥개들에게 붙잽혀. 아, 참. 간도특설대 물었디?"
"네."
"1930년대 말이 되자 동북(만주) 일대에 항일무장 력량이 날로 커가고, 유격전쟁이 활발했디. 그러자 왜놈들이 조선인 항일무장 세력을 말살하려구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름) 전법으로 조선인특설부대를 만들었디. 그게 나중에 '간도특설부대'로 이름이 바꿨디. 1941년 겨울인가 내레 두만강변 도문에서 거 놈을 만났디. 어느 날 아침, 놈들 일당이 우리 밀영에 불을 지르고, 기관총을 난사했는데, 내레 마팀 뒷간에서 볼 일 보다가 얼른 산으로 도망쳐 살아났디. 그때 횃불을 지붕에 던진 놈이 바로 거 놈이었디."
"기런 일두 있었구만요."

귀무덤

"거 참, 인생이란 묘하더구만. 기렇게 다시 전선에서 만날 둘이야.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 그대로였디. 기때 놈들은 삼광작전(三光作戰; 殺光, 燒光, 槍光)이라 하여, 우리 독립군을 잡는대로 다 죽이고,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양식을 모두 다 빼앗는가 하면, 부녀자들을 만나는 족족 강간했디."
"네에? 같은 조선사람끼리 기럴 수가."
"인간 말종들이디. 거 놈들은 왜놈들보다 더 악딜이디. 거 놈들 부대 근처 부너자들은 겁탈 당하디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디. 아마 거 놈들 가운데는 계집질하다 벼락맞아 뒈디는 놈도 나올 꺼야. 기래, 내레 굶어죽어두 기런 놈들한테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디."
"내레 아바지한테 기런 네기 많이 들어시우. 장개석 국부군 군대가 모택동 인민해방군 군대에게 진 것은 부정부패와 계집질 하다가 진 거라고. 장개석 국부군은 부대이동 때마다 꼬리에다가 위안부를 데리고 다녔다고 하더만요."
"기럼, 거 놈들은 자기네가 판 무기가 인민해방군으로 흘러와 제 놈들 가슴을 뚫었디. 위만군 놈들도 마찬가디였어. 푸의라는 허수아비 황제는 밤낮 아편질과 계집질만 했디. 조선사람으로 그런 위만군이 된 놈도 나쁘디만 간도특설대 놈들은 더 악딜이야. 왜정 때 우리 독립군 전사들이 거 놈들한테 수태 죽었댔디. 놈들은 우리 독립군 전사들의 간부는 죽인 뒤 목을 잘라 공회당 같은 곳에 장대로 높이 내건 다음, 상자에 담아 관동군사령부 같은 곳으로 보내서. 기래야 지 놈들 상관인 왜놈들한테 포상을 받거든. 일찍부터 왜놈들은 조선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의 구두나 서류보고는 믿디 않아. 거 놈들은 임진왜란 때 자기네 군사 말도 믿디 않구 조선사람의 목을 잘라 보내라구 했디. 거 부피가 크고 썩는 냄새가 고약하자 나중에는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보냈다구. 지금도 일본 동경에는 귀무덤이란 게 있다더만. 내레 기때 거 놈 뒤통수에다 방아쇠를 당기디 못한 게 천추의 한이야. 더러운 게 목숨이디."
"달리는 차라 삽시간에 조준 발사하기는 쉽디 않앗을 겝네다."
"기렇게 벤멩할 수 잇겟디. 하디만 기래두 내레 기때 방아쇠를 당기야 옳아서. 걔들은 왜놈 사냥개였디. 후세에 누가 역사를 제대로 쓸지 모르겠디만 참, 기때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뎌."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습네다."
"기러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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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즈카(耳塚) 도쿄 도요쿠니진자(豊國神社) 옆에 있는 미미즈카(耳塚)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조선군사들의 귀를 잘라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보고 전공을 치하한 다음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 박도


하늘의 그물

남 대장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명심보감에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글디만 놓티는 것이 없댔습네다. 아마도 뒷날 누군가 그들 이름 석 자를 역사책에 '민족반역자'라구 아주 또렷이 기록할 겁네다."
"기럴 날이 올까?"
"우리 겨레가 살아있는 한 틀림없이 기런 걸 만들 날이 올 거야요. 만일 나라에서 만들디 않으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한 푼 두 푼 모아 그 자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기록하여  남길 거야요. 기게 역사의 정의디요."
"김 동무레 학교에서 우등생이었구만. 기런 말도 다 알구."
"아넵니다. 내레 기저 얻어들은 풍월입네다."
"김 동무 말을 들으니 내레 기분이 돟군. 하긴 모든 권력은 총칼에서 나온다고 하여, 총칼이 붓보다 센 것 같지만, 결국 붓을 이기디 못하디. 총칼의 힘은 유한하고, 붓으로 쓴 글은 영원히 남거든. 기게 동서고금의 진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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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 관동군사령부 중국 창춘에 있는 옛 일본 관동군사령부로 현재는 창춘시 인민정부 청사로 쓰이고 있었다(1999. 8. 8.). ⓒ 박도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특히 창춘의 옛 일본 관동군사령부 건물은 매우 힘들게 찍은 사진입니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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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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