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도 '추석'이 있다고?

[런던 별곡③] 서양인들이 '보름달'을 무서워하는 까닭

등록 2013.09.20 12:17수정 2013.10.16 11:29
6
원고료로 응원
a

런던에도 보름달이 떴다. 9월 18일 저녁(현지 시간) 런던 북부에 뜬 보름달. ⓒ 이주빈


영국 런던에 보름달이 떴다. 이 보름달이 비고 다시 채워져 그 다음 보름달이 될 때까지는 29.53일이 걸린다. 그러니까 일 년이면 열두 번은 지구별 어디에서든 보름달을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들에게 추석(秋夕) 보름달은 여느 달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추석 연휴 기간에만 35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과 가족을 찾아 이동한다. 또 푸짐한 추석 상을 차리느라 이집 저집에서 전 지지는 냄새가 끊이질 않는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추석 민심'을 살피느라 그동안 꼿꼿이 세웠던 허리를 숙인다.

이런 모든 추석 풍경의 한가운데 보름달이 있다. 고향을 찾아가는 이들에게 보름달은 추억의 나침반이다. 사정으로 고향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름달은 향수의 둥지다. 품었던 소원들을 꺼내 기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름달은 아름다운 치성(致誠)의 거처다.

한국 사람들을 비롯한 동양인들에게 보름달은 이처럼 아련하고 정겹게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지구별로부터 가장 멀리 있을 땐 40만5600km나 떨어져 있는 위성. 그 먼 위성에 방아 찧는 토끼가 살고 있다고 상상하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아온 땅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그립다.

한국에 있는 벗들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한가위 소식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한다. 영국도 사람 사는 땅이니 한가위처럼 성대하진 않더라도 나름의 추수감사절 행사는 하지 않을까? 동네를 둘러보지만 조용하기만 하다.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다른 영국의 '추수절'

믿기지 않겠지만 영국에도 '추석'과 같은 명절이 있다. '추수절(Harvest Sunday)'이라고 부르는데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과는 차이가 있다. 영국은 말 그대로 '수확(Harvest)'을 기념하는 것이고, 미국은 '감사를 드리는 것(Thanksgiving)'이다.


우선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감사드리는 것'을 중시하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해간 청교도들. 먹고살길 막막했던 그들에게 아메리카 선주민들은 경작법을 가르쳐준다. 수확이 끝난 11월, 감사한 마음에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선주민들을 초대해 야생 칠면조(Turkey)를 나눠 먹었던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다.

추수감사절을 '터키 데이(Turkey day)라고 하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추수감사절엔 가족들과 단란하게 모여 한 해의 수확에 대해 감사하면서 칠면조 요리 등을 먹는다. 초대해서 감사인사를 전할 아메리카 선주민들을 내쳐버린 그들에게 이제 추수감사절은 철저히 '가족 중심'의 명절이 되었다.


반면에 영국의 '추수절(Harvest Sunday)'은 '마을 중심'의 명절이다. 추수절의 행사 내용을 보면 공동체를 중시하는 농경사회의 전통과 문화에 철저히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을 수확기가 되면 집집마다 빚은 술과 치즈를 내놓고 함께 나눠먹는다. 그리고 남자들은 이삭을 베고 여자들은 뒤를 따르며 이삭 단을 쌓는다.

이때 이삭 단은 슬렁슬렁 쌓아 남은 이삭은 동네 가난한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줍게 한다. 가난한 이웃들이 잔치하듯 한겨울을 날 식량을 챙기게 하는 배려가 아름답다. 단 쌓기가 끝나면 집집마다 내놓은 술과 치즈 등으로 잔치판을 벌인다. 그렇게 이삭과 술과 치즈를 함께 나누는 마을 축제가 영국의 추수절이었다.

이렇듯 마을공동체가 가을 수확을  함께 기뻐하며 나눔의 잔치를 연다는 점에서 영국의 추수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보다는 한국의 추석과 그 뿌리가 가깝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추수절은 영국이 급속하게 자본주의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그 명성을 잃었다.

음력 8월 15일로 날짜가 정해진 추석처럼 추수절은 특정한 날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부 학교와 교회에서 임의로 날을 정해 축제를 하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기부하는 것으로 추수절을 대신한다. 소중한 영국의 전통이 소멸되어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추수절보다 할로윈에 더 열광하는 것이 영국의 현실이다.

한국에서 보름달은 '착한 존재', 그렇다면 서양에서는?

a

18일 밤, 한국 제주도에도 보름달이 떴다. 제주 강정마을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구럼비, 바람이 분다>의 후반 작업을 하고 있는 조성봉 감독이 촬영했다. ⓒ 조성봉 감독


환하고 둥근 보름달이 떴다고 한국의 벗들이 달맞이 사진을 서로 주고받는다. 모남 없이 둥근 보름달은 오늘밤 또 얼마나 많은 기원들을 기꺼이 안았을까.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 모두 보름달처럼 넉넉하다.

이처럼 풍성한 보름달은 한국 사람들에겐 소원을 기대는 착한 존재다. 그러나 서양에서 보름달(full moon)은 괴기한 기운을 내뿜는 공포의 상징이다. 라틴어 luna(달)에서 온 영어 lunatic은 '달의 영향을 받은'이라는 뜻과 함께 '미친, 정신 이상의'라는 뜻을 지니고 있을 정도다.

태양의 시간을 사는 서양인들은 낮은 신이 지배하고, 밤은 악마가 지배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드라큘라, 늑대인간, 뱀파이어 등 공포의 상징들은 푸른 빛 감도는 보름달(full moon)에서 악령의 기운을 충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보름달 창창하게 뜬 밤은 얼마나 무섭겠는가.

음력 즉 달의 시간을 사는 동양인들에게 보름달은 비고, 채움을 반복하는 '순환의 시간'이다. 그 채움과 비움의 순환과 반복의 정점에 보름달이 있다. 찰나를 스치는 존재일지라도 이 끝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기도를 한다. 그래서 기도는 긍휼(矜恤)이고 축원(祝願)이다.

해가 떴다 져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여기는 것이 서양 사람들이 품고 있는 '직선의 시간관'이다. 반듯이 놓인 자처럼 시간은 한 치 한 치 쌓여가고, 그러던 어느 날 삶은 아무 기약 없이 끝나버린다. 허튼 기약조차 없는 생이란 얼마나 강퍅하든가.   
 
반겨주는 이 없는 이국의 밤하늘에 둥실 뜬 보름달을 다시 본다. 달의 나이, 월령(月齡)은 달이 안보일 때를 '0'으로 해서 세기 시작한다. 본래 아무것도 없었으니 다 채워도 다시 '0'으로 돌아온다. 허무한 종말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시작이다. 달의 시간을 사는, 달의 자식들이 태양만큼 빛나는 까닭이다. 
#런던 #보름달 #추석 #추수감사절 #할로윈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라면 한 봉지 10원'... 익산이 발칵 뒤집어졌다
  2. 2 기아타이거즈는 북한군? KBS 유튜브 영상에 '발칵'
  3. 3 "이러다간 몰살"... 낙동강 해평습지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일
  4. 4 한밤중 시청역 참사 현장 찾은 김건희 여사에 쏟아진 비판, 왜?
  5. 5 내 차 박은 덤프트럭... 운전자 보고 깜짝 놀란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