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리포터> 촬영지가 윈스턴 처칠의 모교?

[런던 별곡⑦] 윈스턴 처칠이 힘들 때마다 찾던 곳은...

등록 2013.10.07 21:23수정 2013.11.0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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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서부 해로우 힐에 있는 해로우 스쿨. 윈스턴 처칠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 이주빈


우연찮게 마을도서관에서 학교 탐방 안내 포스터를 본 것은 행운이었다. 5파운드(한화로 약 8600원)만 내면 동네에 있는 학교를 둘러볼 수 있다니 주말 일정치고는 괜찮았다. 지금에 와서 하는 고백이지만 학교 방문 기사를 쓰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영국 현지시각으로 10월 5일 토요일 오후 2시. 유달리 친절했던 한 버스 기사의 도움으로 한 오래된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런던 북서부 해로우 힐(Harrow Hill)에 있는 학교 이름은 '해로우 스쿨(Harrow School)'.

주말 나들이 하듯 둘러볼 생각이었기에 탐방하는 학교에 대한 사전조사는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습관처럼 취재수첩과 펜, 카메라를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쓸 만한 얘깃거리'가 나오면 스케치나 해올 요량이었다.

한 교직원이 학교 탐방을 신청한 이들을 불러 모았다. 부모와 함께 온 만 열 살 어린이부터 70대 노인까지, 약 30명인 참가자들의 얼굴은 다양했다. 현장에서 간략한 참가신청 절차가 끝나고 학교 탐방이 시작되었다.

탐방은 '오래된 학교(Old School)'라는 이름의 건물 안에 있는 '네 번째 교실(4th Room)'에서 시작되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랜 세월 숙성된 오크나무향이 확 밀려왔다. 교실 벽이며 바닥, 교탁과 의자가 모두 오크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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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우 스쿨을 입학하는 학생들은 벽에 자신의 이름과 입학 연도를 쓰는 전통을 400년 넘도록 이어가고 있다. 올드 스쿨 건물에 있는 이 네번째 교실에서 영화 <해리포터>를 촬영했다. ⓒ 이주빈


탐방 안내를 맡은 교직원이 "이 교실에서 영화 <해리포터>를 촬영했다"고 했을 때 영화의 한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 흘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직원의 설명에 깜짝 놀랐다.

"교실 벽에 새겨진 이름들은 이 학교를 다닌 이들이에요. 그 옆 숫자는 그 사람이 입학한 해고요. 저기 보세요, 처칠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죠? 맞아요, 처칠 전 수상도 이 학교를 다녔답니다. 그 옆에 새겨진 또 다른 처칠은 처칠 경의 동생 이름입니다. 동생도 이 학교를 다녔지요."


1571년 부유한 농부였던 존 라이언(John Lyon)은 "돈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지만 배움만은 남에게  뺏기지 않고 영원히 자신이 가지고 갈수 있는 것"이라며 학교를 설립한다. 이듬해인 1572년 설립 인가를 받았으니 해로우 스쿨은 올해 설립 441년을 맞았다.

한국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통합과정의 해로우 스쿨은 일반적으로 만 13세에 입학해 만 18살에 졸업한다. 해로우 스쿨은 기숙학교인데 2013년 현재 약 830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학생 정원 구성 비율은 매년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60~70%는 영국 학생들이고, 30~40%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다.

이튼 스쿨과 함께 명문학교로 꼽히는 해로우 스쿨은 1년 학비가 한국 돈으로 약 5600만 원 정도 된다. 이 때문에 "해로우 스쿨에 다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쓴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부농(富農)이 세운 학교는 서민의 자녀는 쉽게 넘보지 못할 '귀족학교'가 되어 있는 것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8세기 낭만파를 대표했던 시인 조지 바이런(George Byron)과 같은 수많은 인재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해로우 스쿨 측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비롯해 영국 총리 7명을 배출했다는 것도 빼놓지 않고 자랑한다.

특히 '해로우 스쿨 = 윈스턴 처칠'이랄 정도로 학교 홍보마케팅에 처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처칠이 그만큼 영국인들의 신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BBC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처칠은 '영국의 국보'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물리치고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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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우 스쿨은 학교 홍보를 하면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수상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학교를 빛낸 인물의 앞자리를 윈스턴 처칠이 차지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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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우 스쿨의 대강당. 1년에 두번 열리는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유명하다. 무대 정면에는 해로우 스쿨 출신의 처칠 전 수상 등이 받은 훈장이 전시되어 있다. ⓒ 이주빈


152cm의 작은 키, 지적 열등감과 어눌한 말주변 때문에 외운 원고가 없으면 연설조차 하지 않았던 처칠. 그에게 영국인들이 이처럼 아낌없는 신망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칠은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아니었다. 해로우 스쿨 입학도 보수당 거물 정치인이었던 아버지 랜돌프 처칠의 후광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가 해로우 스쿨을 졸업하고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캠브리지를 합쳐서 일컫는 말)'에 진학하지 않고 육군사관학교에 간 것도 학업 성적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정치인으로서도 처칠은 1940년 이전까지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저 대중적 인기가 좋은 참전 군인출신 의원이었을 뿐이고, 심지어 당적을 두 번이나 옮겨 한국으로 치면 '철새 정치인'이라는 조롱까지 듣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처칠은 이 모든 것을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해냈다. 지적 열등감은 숱한 역사공부와 억척스런 글쓰기를 통해 극복해갔다. 그는 아버지 전기인 <랜돌프 처칠 경>을 비롯해 수많은 책을 썼다. 특히 처칠은 전쟁회고록인 <제2차 세계대전>을 써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눌했던 말솜씨는 역대 위대한 연설과 빼어난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의 연설을 외우고 따라하는 연습으로 극복해갔다. '탁월한 정치연설가 처칠'의 이미지 뒤에는 자격지심에 주눅 들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정치인 처칠이 있었던 것이다.

마흔 두 살 되던 해였던 1916년 이후 처칠은 힘들 때마다 모교인 해로우 스쿨을 찾았다고 한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조국. 그는 모교를 방문할 때마다 크림 전쟁과 보아 전쟁, 1,2차 세계 대전 때 전사한 1000명이 넘는 해로우 스쿨 졸업생들의 이름을 되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후 전쟁기념비에 그가 새긴 문구처럼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전쟁에서는 결의, 패배에서는 도전, 승리에서는 아량, 평화 시에는 선의. In War: Resolution, In Defeat: Defiance, In Victory: Magnanimity, In Peace: Goodwill." 
- 박지향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382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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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우 스쿨 도서관의 유리창과 조명등. ⓒ 이주빈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저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을 통해 "처칠은 위인이었다기보다 거인이었다"고 평가한다. 박 교수는 "어느 인간보다도 '거대한 인간'"이었기에 "거대한 만큼 업적도, 실수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컸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거대한 인간'을 넘어서 셰익스피어를 넘어선 '신화적 존재'가 되고 있다. 영국인들이 처칠에게 기대하는 신화는 열등감에 주눅 들지 않는 용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결단력이 아닐까. 삶은 그만큼 비루하고, 생활은 지겹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해로우 스쿨 탐방 마지막 장소는 다름 아닌 도서관이었다. 60만평의 부지에 대형건물 20개동, 천연잔디구장만 8개가 있는 학교. 그러나 해로우 스쿨을 명문으로 만드는 것은 도서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틴어는 못하지만 역사공부를 통해 통찰력을 키워가는 '제2의 처칠'이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바로 그곳 말이다.
#윈스턴 처칠 #해로우 스쿨 #노벨문학상 #세계대전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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