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포르는 한의사, 다큐영화감독이자 에콜로지스트, 페미니스트다.
목수정
마다가스카르. 1896년부터 프랑스령이었던 그곳에서 군인이던 아버지와 전업주부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루이즈는 태어났다. 그 넉넉한 태양 아래, 1년 내내 풍성하게 익어가던 향긋한 과일들, 그 어떤 인종적 편견이나 갈등도 모른 채 함께 재잘거리던 친구들, 너그럽던 이웃들 사이에서 나른하고 평화롭게 8년간의 황금빛 유년기가 흘러갔다.
아버지가 군인이었지만, 딱히 전쟁이 있던 것도 아니고, 어떤 사회적 갈등이 군인의 삶을 긴장시킬 일도 없던 터라 평화의 시간들이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한 건, 1960년 알제리-프랑스 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쟁은 모두의 발목을 잡고 수렁으로 직진한다.
아버지는 전장에 배치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된다. 아버지가 알제리로 떠나시고 어머니와 아이들이 정착했던 곳은 보르도였다.
노예들을 실어 나르던 악명 높은 무역항. 포도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전형적인 부르주와 도시에서, 루이즈는 처음으로 균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날씨는 훨씬 차가웠고, 사람들은 더욱 더 차가웠다. 어머니도 아이들도, 심지어는 전장에 나가있던 아버지도 갑자기 불행에 사로잡혔다. 군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이 폭력적인 전쟁을 참을 수도, 알제리인들을 짐승 취급하는 프랑스군의 오만을 견딜 수도 없어, 전쟁 중에 퇴역을 신청한다. 다행히 그 청이 받아들여져 전쟁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턴 생활고라는 또 다른 복병이 가족을 엄습했다.
중학생이 된 루이즈는 공립 여자기숙학교에 보내졌다. 학교는 그녀가 일찍이 알지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다뤘다. 손목시계를 차는 것도, 선생님 앞에서 어깨를 으쓱거리거나, 멀쩡히 눈 뜨고 선생님을 도전적으로 쳐다보는 것도 금지였다(과연 이 시기의 프랑스는 피 끓는 젊은이들의 혁명을 부르는 사회였다). 그 숨 막히는 학교의 억압은 루이즈로 하여금 제어할 수 없는 저항심을 즉각 불러일으킨다. 학업성적은 우수하지만, 너무도 반항적인 당신들의 딸을 더 이상 이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며, 학교는 그녀를 1년 만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곤 늘 같은 이유로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해야 했다.
질풍노도와 68혁명이 만났을 때이미 문제아의 전선에 전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던 그녀가 68혁명의 불꽃에 감전되었을 때 그녀는 15세였다. 오빠와 함께 남매는 가두에 나서서 매일 열정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이 분노하던 이 부르주아 도시. 자신의 친구들이던 흑인들을 데려다 노예로 팔아먹고, 그들의 엉덩이를 구둣발로 걷어차며, 욕을 하던 이 오만한 프랑스, 시민지를 개척하고, 원주민들의 피를 빨며, 전쟁이나 할 줄 아는 제국주의 프랑스를 맘껏 저주하고, 깨부쉈다. 슈퍼마켓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카트에 담으시오. 그리고 돈 내지 말고 이곳을 떠나시오'라는 피켓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선동하며 흥청대는 자본주의에 저항했다.
학생들은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았고, 책상과 걸상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교실에서는 수업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대신 그들은 마오를 공부하고, 헤겔·마르크스 같은 유물론 철학자들과 빌헬름 라이히 같은 성정치학자, 기 드보르·보리스 비앙 등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토론했다. 학교가 허락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해가고 있었다. 어리석은 소비지상주의의 세상. 권위와 자본으로 마비되기 시작한 프랑스를 젊은 세대들은 마구 난타했다.
그러나 68의 흥분 속에, 그토록 열렬하고 신실하던 정치적 동기만이 존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간만에 벌어진 이 축제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데만 열중하던 이들도 많았다. 그 뜨거운 시간들이 지나자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 그 수많은 68세대들의 허무에 대해 말하는 동안 그녀의 눈빛은 잠시 매서워졌다.
역사의 바퀴가 굴러갈 때, 진정으로 진심으로 그 바퀴에 몸을 부딪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68은 단지 68년에만 일어나고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었다. 68년 5월에 점화되었으나, 70년대 중후반까지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지치지 않고 그 불길을 이어가며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던 10년여에 걸친 긴 투쟁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루이즈는 학생대표가 되었고, 그녀는 당시의 정치적 정황 속에서 동맹 휴업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49대 51로 휴업이 부결된다. 부결? 하지만 동맹휴업을 강행했다. 역사선생님이 루이즈와 그 동지들을 나무랐다. "너희들의 결정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아. 왜 투표결과를 무시하는 거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맹점에 처음으로 부딪히고 만다. "민주주의가 이토록 어리석은 거라면, 우린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아. 우린 혁명을 하겠어!" 루이즈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거리에서 대치하던 신·구세대 간의 갈등이 가정 안에선 없었겠는가. 루이즈는 가정 내에서 벌어졌던 68의 격렬한 전쟁을 토로한다. 오빠와 루이즈는 세상에 대한 모든 증오를 그대로 부모들에게 쏟아냈다. 왜 하필 아버지는 군인 따위의 직업을 가졌던 거며, 어머니는 왜 그토록 무력하게 아버지 밑에 종속되어 사는 건지를. 왜! 왜! 왜!
담배를 피우고, 학교 파업을 주도하고, 옷은 히피처럼 입고 다니며, 가슴은 분노로 가득 찬 딸을 감당하지 못하던 아버지는 급기야 폭력을 행사했고, 그것으로 둘 사이는 영영 멀어지게 된다. 딸의 경멸과 자신이 휘두른 폭력의 충격으로 아버지는 병을 얻었고, 죽는 날까지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해도 타협도 할 줄 모르고 오로지 이글거리며 타오르기만 했던 분노의 불길을 다스리기에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너무도 연약했다.
촉발되기 시작한 가정 내에서의 분노, 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 가슴 속 모두에 파고들어가 그들의 가슴을 난타했다. 루이즈의 한 친구는 자신이 시작했지만, 가족을 멍들이기 시작한 폭력적인 분위기에 스스로 질식되어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에 대한 남매의 공격이 반드시 정당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그녀는 토로한다. 그들은 단지 가정 내에서 기성세대를 대표한다는 그 피할 수 없는 죄목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헤테로의 지루한 삶을 거부하기 위해 호모로 살 것을 선언 그 즈음 루이즈는 자신은 결코 이 고루한 세상에 젖어드는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없다고 결심하면서, 헤테로(hetero)이기를 거부하고 동성애자가 될 것을 선언한다. 그 어떤 동성애자로서의 경험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정치적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 이후 그녀는 지금까지 동성애자로 살아왔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처음 찾아간 정치 그룹은 동성애자들의 그룹이었다. 거기엔 온통 남자들뿐이었다. 그곳을 떠날 것을 결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 찾아갔던 그룹은 여성해방운동 모임(MLF: Mouvement de Libération des Femmes)이었다. 비로소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분노들이 함께 나누는 지성과 지혜라는 출구를 타고 해방되는 세상을 거기서 발견했다. 각자 자신들이 경험했던 사례들을 토로하고, 그것들을 이론화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통로들을 마련해나가기 위한 모의들을 해나갔다. 그리고 여성해방운동 모임은 앙투아네트 푸크(Antoinette Fouque)라는 정신분석학자의 주도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출판사 설립으로 이어진다. 루이즈는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출판사의 활동에 참여한다. 대학원에 진학해 교사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는 파리로 올라오고, 출판사에서 본격적으로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둘 다를 놓아버렸다. 중·고 시절 겪었던 학교의 악몽이 학교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했고, 출판사에서 주간지를 발간하게 되면서 빚어진 갈등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이후 루이즈는 그 흔한 방황과 혼돈의 20대로 몸을 휘감는다. 비서·안내데스크·교환원 등의 일자리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삶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러다가 "너의 재능을 소모하지 마"라며 손을 내밀어 준 한 연극배우 덕에 한 극장의 홍보담당자가 되고, 이후 연극과 영화계에 진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