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 되고픈 '유신 공주'가 여왕의 마차를 탔다"

[런던 별곡⑫] 엘리자베스 1세가 '롤 모델'이라는 박근혜 대통령

등록 2013.11.08 14:12수정 2013.11.0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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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5일 오후 버킹엄궁 인근 근위기병대 연병장인 호스 가드 광장에서 공식환영식을 마친 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남편 에든 버러공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영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한국 언론은 박 대통령이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왕실 마차를 함께 탄 것을 두고 '최고의 의전'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심지어 어떤 기사는 "박 대통령을 태운 왕실마차가 버킹엄궁에 들어설 때는 햇빛이 쨍쨍 비쳤다"고 낯부끄러운 줄 모르는 아양을 떨어 많은 이들이 조소했다.

남의 나라에서 임시로 더부살이하는 처지다보니 모국 관련 소식은 언제나 반갑기 그지없다. 그래서 영국의 주요 신문들은 박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을까 살펴봤지만 관련 기사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텔레그라프>가 한국 전문가의 기고를 받아 보도했지만 "박 대통령이 박정희의 딸이자 대선이 불공정했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또 <파이낸셜 타임스>도 보도를 했지만 산적한 현안들을 조목조목 짚으며 '안보다는 밖에서 평가받는 박근혜'라고 제목을 달아 약간 비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 언론들이 거의 보도를 하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 영국 방문에 때를 맞춘 시위도 벌어졌다. 4일 저녁엔 주영국 한국대사관 앞에서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고 대선 무효를 주장하는 촛불시위가 열렸다. 6일엔 총리 관저가 있는 런던 다우닝가에서 바레인으로 최루탄을 수출하는 한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박 대통령이 '최고의 의전'을 받는 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과 반인권 화약물질인 최루탄 수출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런던에 울려 퍼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민주주의 퇴행과 반인권의 수출이라는 현실은 '유신 독재자 박정희'로부터 이어지는 그림자다.

헌정 사상 초유이자 세계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힘든 '정당 해산 청구'.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박 대통령이 이 사안을 새벽에 '전자결재'했다고 알려지자 많은 교포들은 '망측한 사건'이라고 혀를 찼다. 이들이 박 대통령이 영국 왕실 마차를 탄 것을 두고 "여왕이 되고픈 '유신 공주'가 여왕의 마차를 탔다"고 꼬집은 것은 모국에서 민주주의 퇴행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왕이 되고픈 '유신 공주'가 여왕의 마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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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교포들이 박근혜 대통령 영국 방문에 맞춰 런던 빅벤 앞에서 '대선 무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대비잭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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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교포들이 주영국 한국대사관 앞에서 선거무효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대비잭순 제공


박 대통령이 여왕이 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엘리자베스 1세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 나는 이미 잉글랜드를 남편으로 섬기고 있다"고 했듯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 왕'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하면 떠오르는 '처녀 왕'이라는 이미지에는 두 가지 의도가 숨어 있다. 하나는 지극히 남성중심 사회인 영국에서 여왕인 그를 '모두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만들어 충성과 복종을 합리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또 하나는 내세울 만한 고유의 신화가 없는 영국이 '처녀 왕'을 신비화함으로써 신화 궁핍 콤플렉스를 만회하고자 하는 계산도 깔려 있다.

재임 시절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강한 모습과 함께 '구빈법(救貧法)'을 제정해 사회복지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구빈법은 구빈세를 만들어 가난을 개인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공공의 문제로 인식하고 시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최소한 1년의 두 번은 백성들을 현장에서 직접 만나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중국의 하방정치와 근래 한국에서 회자되는 생활정치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근대 개념이 성립되기 전인 시절, 소통하려는 군주의 모습이 아름답다.

박 대통령이 이 가운데 어떤 면을 보고 엘리자베스 1세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는지 알 길이 없다. 증세 논란에서 볼 수 있듯 박 대통령은 서민보다는 부자 편으로 기울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부자세'까지 만들어 서민을 구제하려 했던 엘리자베스 1세와는 차이가 크다.

또 박 대통령은 자주독립국의 핵심 요소랄 수 있는 전시작전권마저 미국에게서 되찾아오는 일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당시 세계 최강이던 스페인 함대와 맞붙어 잉글랜드의 자존심을 당당하게 세우던 엘리자베스 1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신교인 성공회 신자였지만 구교인 가톨릭과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종교로 나뉜 국민통합을 위해 열성을 다 바친 것이다. 지난 대선 당시 텔레비전 토론에서 자신을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의 딸, 유신 독재의 공주"라고 몰아세웠던 통합진보당을 향해 내란음모죄를 씌워 기소하고, 아예 정당 해산 청구까지 새벽에 결재하는 박 대통령. 통합하기 가장 어렵다는 '종교 통합'의 큰 행보를 걸었던 엘리자베스 1세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어떤 면을 보고 '롤 모델'로 삼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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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영국 방문을 보도한 <파이낸셜 타임스> 5일치 기사의 제목은 '안보다는 밖에서 평가 받는 박근혜'였다. ⓒ <파이낸셜 타임스> 화면 갈무리


영국은 여왕의 나라다. "여왕을 부정하는 것은 영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영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영국 헌법에 따르면 여왕은 영국의 국가 원수다. 여왕은 의회를  소집하거나 해산할 수 있고,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나 평화를 선언할 수 있다. 여왕은 내각의 제안에 따라 죄인을 사면한다. 귀족이나 기사 작위를 내리는 고유권한은 여전하다. 물론 국가원수 직은 명목상 유지하고 일체의 정치는 의회와 내각에 위임한다.

여왕은 또 영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54개국으로 구성된 영국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의 수장이다. 아울러 여왕은 영국 성공회의 '최고 치리자(治理者)'도 맡고 있다. 실질적인 종교 지도자가 아닌 영국 성공회의 상징적 지도자 역할이다.

불문헌법인 영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막강한 권한을 위임한 채 여왕은 왕실을 대표하는 국가 원로로서만 행세한다. 영국인들의 여왕과 왕실에 대한 신망은 두터워서 2012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과반 이상이 '신뢰한다'고 답했다.

국민들의 신뢰를 받는 여왕의 왕실마차를 타고 가면서 박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이기를 꿈꿨을까. 자신의 롤 모델이라는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를 선물로 건네받으면서 박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가 되기를 다짐했을까. 영국 여왕과 왕실마차를 함께 탄 '최고의 의전'보다 중요한 것은 제나라 국민들의 아낌없는 박수와 지지가 아닐까.

<파이낸셜 타임스> 5일치 '안보다는 밖에서 평가받는 박근혜'라는 제목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했던 대선공약을 풀어나가야 하는 것과 함께, 야당들이 그녀를 독재적인 성격의 아버지와 연관짓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 남아 있다."

"Ms Park still faces a stern challenge in unwinding her generous election promises – as well as from political opponents eager to associate her with the authoritarian characteristics of her father."
#영국 왕실마차 #박근혜 #대선무효 #여왕 #엘리자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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