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빼앗긴 영국, 금융으로 일어선다?

[런던 별곡⑭] 런던을 떠나며 생각하는 영국의 두 얼굴

등록 2013.11.20 15:29수정 2013.11.20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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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내의 나무동상이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더 샤드를 응시하고 있다. ⓒ 이주빈


런던에 도착한 첫날, 그 사내를 처음 만났다. 사내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템즈강변 런던시청사 가는 길에 서 있었다. 검은색 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은 사내는 목상(木像)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영락없이 런던 날씨였다. 하루에 사계절이 있다는 런던 날씨처럼 사내는 기쁜 듯 슬픈 듯, 반가운 듯 쓸쓸한 듯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시선 끝에는 '더 샤드(THE SHADD)'가 우뚝 서 있었다. 샤드는 높이 310미터, 전체 72층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다. 샤드에서 바라보는 런던 야경은 말 그대로 황홀해서 관광객은 물론 런던시민들도 즐겨 찾는다.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복잡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평범하다 못해 누추한 차림의 사내. 이 기묘한 대조의 장면은 영국의 오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자본주의 종주국이 쌓아올린 화려한 욕망의 거탑. 하지만, 정작 그 거탑을 쌓아올린 사내의 욕망은 거세당하거나 통제당하고 말았다.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 이제는 금융업이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농업과 특히 제조업이 강한 나라였다. 인류사에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남겼고, 한때 '롤스로이스'나 '랜드로버'는 자동차로 집약된 영국의 막강한 2차 산업을 상징했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일이 되고 말았다. 세계 갑부들이 목에 힘주고 타던 '롤스로이스'는 천적이었던 독일의 BMW가 인수해버렸고, '랜드로버'는 인도의 자동차회사 타타가 인수해 기업 국적이 '영국'에서 '인도'로 바뀌고 말았다.

2012년 기준으로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제조업 등 2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21.1%였고, 농업은 겨우 0.7%에 불과했다.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의 비중이 무려 77.2%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금융업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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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템즈강변의 화려한 야경. 왼쪽으론 '런던아이'가, 오른쪽으론 빅벤과 의사당이 보인다. ⓒ 이주빈


영국 금융 산업은 국내 산업 비중만 넓은 것이 아니라 강한 대외 경쟁력까지 갖추고 있다. 국제금융센터(IFSL)에 따르면 영국은 파생상품 유통(43%), 해외증권 유통(41%), 외환거래(32%), 국가 간 은행 대출(20%) 등의 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이로써 런던은 뉴욕, 도쿄와 함께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금융도시'의 반열에 올라섰다.

지난 11월 초, 영국을 국빈 방문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런던시티(City of London)' 시장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 그리고 만찬사를 통해 "세계 금융 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영국과의 금융 파트너십 형성에 적극 나설 것"이라며 "세계의 금융과 비즈니스 중심인 런던시가 큰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런던시티는 한국으로 치면 특별한 기초자치단체에 불과하다. 시장은 선출직이 아닌 명예대사 격이다. 하지만 런던시티는 '금융특구'로 세계 금융의 1/3이 거래되고 있는 광활한 곳이다. 특히 세계 원자재의 절반 가량이 런던시티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런던시티는 융성하는 영국 금융 산업의 상징인 것이다.

날로 성장하는 영국의 금융 산업은 런던시티는 물론 템즈강 하류에 위치한 커네리 워프(Canary Wharf) 지역까지 금융가로 변모시키고 있다. 생김새가 오이를 닮아 일명 '거킨(gherkin)'이라 불리는 '스위스 보험' 빌딩을 비롯 HSBC, 씨티그룹 등 내로라하는 금융사들이 커네리 워프에 입주해 있다.

국민총생산은 세계 6위, 행복지수는 74위

눈부신 영국의 금융 산업 성장에 힘입은 덕분일까. 2012년 기준으로 영국의 GDP(국민총생산, 국내경제활동의 지표로 쓰임) 순위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에 이어 세계 6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15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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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금융 지역이었던 런던시티 외에도 템즈강 하류에 위치한 커네리 워프 지역에까지 세계적인 금융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 템즈강 너머로 오른쪽에 보이는 오이를 닮아 '더킨'이라 불리는 '스위스 보험' 빌딩이 보인다. 이 지역엔 새로 입주하려는 금융 회사들 때문에 공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이주빈


그러나 영국 신경제재단(NEF)이 조사해서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는 충격적이었다. 영국은 행복지수 43.3%로 세계 74위를 기록했다. 1위는 행복지수 76.1%를 기록한 코스타리카였고, 한국은 44.4%의 행복지수로 68위였다.

또 영국은 유엔개발계획(UNDP)이 국가별 국민소득, 교육수준, 평균수명, 유아사망률 등을 종합평가해서 발표하는 '2013년 인간개발지수(HDI)' 순위에서도 26위를 기록했다. 1위는 노르웨이였고, 2위는 호주였으며 3위는 미국이었다. 한국은 영국보다 14단계 위인 12위를 기록했다. "나라는 부자지만 국민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실감나는 조사 결과들이다.

영국 통계청(ONS)이 조사한 2013년 7월 현재 영국의 실업률은 7.8%로 높은 편이다. 특히 8월 14일 현재 만 16세부터 24세까지 청년실업률은 무려 21.4%에 이른다. 지나치게 취약해진 2차 산업 비중이 높은 실업률의 한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고, 2차 산업의 기반을 다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나오고 있다. '노동유연성 확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정리해고의 후과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높은 실업률 속에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물가는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음식 가격은 작년에 비해 올해 4월 현재 4.6%가 증가했고, 전기료는 작년에 비해 2.2% 증가했다.

지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물가는 꾸준히 오르고 있지만 실질 임금은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 통계청은 2013년 임금이 평균 2% 인상되었지만 물가상승률은 2.8%였다고 발표했다. 임금 인상률이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면 노동자는 실질임금은 더 인하되었다고 체감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하듯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 소비자 단체의 조사 발표에 의하면 "영국 가정 인구 5명 가운데 1명은 단지 음식을 사먹기 위해서 빚을 낸다"는 것이다. 또 영국 런던의 임대료는 비싸기로 유명해서 독일 베를린보다 평균 세 배 정도 비싸다.

부자나라에서 국민도 행복해지는 그날은 올까

영국을 다녀간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의 한 모델로 영국의 금융 산업을 예시하며 금융시장 개방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통계 지표가 말해주듯 영국은 나라는 부자가 됐을지언정 국민은 행복하지 않는 우려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가 국민행복 시대를 여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해왔다. 단지 음식을 사먹기 위해서 빚을 내고, 60%에 가까운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하는 나라가 국민행복 시대의 '롤 모델'은 아닐 것이다. 

런던을 떠나기 전 다시 사내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복잡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자본주의 욕망의 거탑 같은 샤드 빌딩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금융업으로 다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꿈꾸고 있는 나라, 영국. 사내에게도 '부자가 된 나라'와 함께 살림살이는 나아지고 행복해질 날은 찾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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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사계절이 있다는 런던 날씨처럼 사내는 기쁜 듯 슬픈 듯, 반가운 듯 쓸쓸한 듯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이주빈


#런던 #템즈강 #박근혜 #금융 #행복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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