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죽을 뚫고 나온 새싹에서부터 생명, 살아있음, 신선함의 의미가 생겨났으며 막 태어나 낯설다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漢典
<주역>에 나오는 '생생불식(生生不息)'라는 말이 애니메이션영화 <라이언킹>의 중국어버전 주제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를 이어 그침 없이 생장과 번식을 거듭하는 대자연의 위대한 생명력을 잘 표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의 위대한 덕을 생(生)이라 하고, 낳고 또 낳는 것을 역(易)이라 하는데 자연의 지속적인 창조와 재생의 힘이 바로 쉬지 않는 만물의 생성에서부터 기인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날 생(生, shēng)은 갑골문에서 보듯 지표면(一)에서 새싹(屮)이 땅을 비집고 솟아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에서 점차 흙 토(土)와 풀 철(屮)이 결합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소(牛)가 외나무다리(一)를 지나가는 것이 생(生)이라는 해설은 문자 발생학적으로 그릇된 낭설이다. 땅거죽을 뚫고 나온 새싹에서부터 생명, 살아있음, 신선함의 의미가 생겨났으며 막 태어나 낯설다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하루 책을 읽지 않으면 입이 낯설고, 하루 글을 쓰지 않으면 손이 낯설다(一日不读口生,一日不写手生)는 말이나, 생쌀이 이미 밥이 된 것처럼 이미 어떤 일이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生米做成熟飯)고 할 때처럼 다양한 의미로 활용된다.
풀씨가 대지에 떨어져 새싹을 틔우는 생(生)의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여정이다. 좋은 옥토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자갈밭이나 옹색한 바위나 창문 틈에도 날아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장소를 잘못 만나거나(生不逢地), 때를 잘못 만나면(生不逢時) 생명 탄생 자체가 불가능하고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지는 경우도 많다.
사람의 생장 환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싹을 틔우고 잎과 꽃을 피우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인가. 성인인 공자조차도 스스로를 날 때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옛 것을 좋아하고 배움을 구하는데 민첩한 사람이라(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고 칭한 바 있다. 곧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라 학이지지(學而知之)했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마음을 다스리고 참된 본성을 기르는데 노력하지 않고, 책을 읽고도 세상의 이치를 궁리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유생무생(有生無生)'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삶은 잠시 머무는 위탁일 뿐이고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生寄死歸)고 한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하지 않는가. 살아 있다는 생(生)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의미 있는 일에 매진해야 할 이유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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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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