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과 조선 초의 관료 모습.
김종성
정계에 복귀한 하륜은 1398년에 이방원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그때부터 태종 이방원이 하야하기 2년 전인 1416년에 사망할 때까지 하륜이 태종 정권 하에서 부귀영화의 첨단을 걸었다는 점은 그가 영의정을 네 번이나 역임한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또 하륜이 태종 시대의 거의 모든 정책을 결정했다는 점은, 그가 툭하면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은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 숱한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면서도 끝끝내 신변과 명예를 지킨 사실로부터 그가 태종과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하륜이 참모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중에서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하륜은 사전에 주군의 의중을 확인한 뒤에 그에 맞는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관한 증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왕권과 관련된 정책들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건국 직후까지 도평의사사란 기구가 있었다. 신하들이 모여 국가의 최고정책을 결정하는 이 기구는 왕권을 제약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에 이방원이 만든 정종 정권 하에서 하륜은 정부조직 개편을 지휘했다. 이때 그는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바꾸면서, 도평의사사가 갖고 있던 군사권을 의정부에 부여하지 않았다. 왕권을 견제하는 최고정책결정 기구의 힘을 약화시킨 이 같은 조치는, 곧이어 등장할 태종 정권이 신하들의 간섭을 덜 받으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하륜은 태종 집권기인 1414년에는 의정부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신설했다. 6개 행정부서의 수장인 판사들이 국정 현안을 주상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한 이 제도는 왕권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태종시대에 단행된 네 차례의 정부조직 개편 중에서 세 차례를 하륜이 주도한 사실에서도, 그가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가 드러난다.
이렇게 하륜은 이성계의 참모인 정도전과 정반대로 왕권을 극대화하는 데에 치중했다. 정도전이 재상의 정치적 주도권을 관철시키려 한 것과 달리, 하륜은 이방원의 뜻대로 주상의 정치적 주도권을 관찰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륜이 참모로서 장수한 둘째 비결은 어찌 보면 첫째와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그가 주군의 의중을 사전에 확인할 뿐만 아니라 주군과의 상호 교감 속에서 자신의 책략을 수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주군의 의견과 충돌할 경우에는 주군의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스타일이었다. 일반적인 최고급 참모들이 스승의 입장에서 책략을 내놓은 것과 달리, 그는 최고급 참모이면서도 보조자의 입장에서 책략을 내놓았다.
연필로 책략을 썼던 하륜 그런 상황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륜은 자신의 책략이나 제안이 이방원의 비위에 맞을 때까지 계속해서 의견을 내놓았다. 정도전이 자신의 책략을 '잉크'로 썼다면, 하륜은 전영록의 노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처럼 항상 '연필'로 책략을 썼다. 왜냐하면, 주군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깨끗이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민무구·민무질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방원은 왕비 민씨의 남동생들이자 세자 이제(훗날의 양녕대군)의 외삼촌들인 민무구·민무질을 경계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이들이 외척의 지위를 악용해서 차기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원은 핑계를 만들어 이들을 사형으로 몰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