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낳으면 가정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니...

[어느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19] 아들 타령의 결정체, 파테푸르 시크리

등록 2013.12.13 14:14수정 2013.12.13 16:33
0
원고료로 응원
a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아그라로 돌아오는 길의 풍경 (그림 : 더스틴) ⓒ Dustin Burnett


"오늘 가는 데가 어디라고? 파티세라?"

사람은 제각각 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야말로 '젬병'인 것들이 있다. 5년 전 단 한 번 갔던 길도 기억해내는 내비게이션 기능이 장착된 더스틴이지만, 전화번호나 단어 저장 기능에 있어서는 이런 고물도 없다. 내 전화번호는 물론이거니와 자기 전화번호도 생에 단 한번 외워 본 적이 없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위인이다. 생소한 힌두어로 된 지역 이름을 기억할 리가 없다.


"파테푸르 시크리라고. 파.테.푸.르.시.크.리."

파테푸르 시크리는 한때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아그라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도착할 수 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릭샤에 올랐다.

"파테푸르 시크리 가시려고요?"

여행자의 동선 같은 거야 불 보듯 뻔한 릭샤꾼이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더스틴은 파테푸르 시크리가 도대체 뭔지 또다시 혼돈에 빠진 얼굴이다. 이젠 좀 외우지 아저씨?

a

파테푸르 시크리의 로열 컴플렉스(Royal Complex)로 들어가는 입구인 불란드 다르와자(Buland Darwaza). 1572년 구자라트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승리의 문’이다. ⓒ Dustin Burnett


a

파테푸르 시크리의 로얄 컴플렉스.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파테푸르 시크리의 유적들은 대부분 붉은 색을 띤다. ⓒ Dustin Burnett


아들덕에 지어진 무굴 제국의 수도


바나나와 파파야, 사모사가 쌓여있는 노랑, 주황, 초록의 익숙한 인도의 시장 풍경을 지나니, 불긋하게 피어오른 파테푸르 시크리의 유적이 눈앞에 펼쳐진다.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아그라에서 이곳, 파테푸르 시크리로 천도 한 건 1569년의 일이다.

악바르 대제는 당시 인도 대륙을 장악했던 무굴 제국의 번영을 이룩한 황제다. 그런 무굴 제국의 전성기에 수도로 기능했던 도시였다면, 지금의 아그라나 델리 같은 큰 도시가 되어있을 법도 한데. 지금은 500가구 남짓만이 성곽 주변에 남아 있는 작은 마을이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물이 부족한 지역으로, 애초에 한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었다. 물이 없다면 도시로서 기능하기에도 어려울 텐데. 그런 큰 단점에도 불구하고 황금 같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굴 제국이 이곳을 수도로 정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놈의 '아들' 때문이었다.

a

파테푸르 시크리 유적지 내부. 물이 없는 이 곳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긴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다. ⓒ Dustin Burnett


성공적인 정복사업으로 무굴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악바르이지만, 그에게는 끔찍한 고민이 하나 있었다. 13년간 제국의 대를 이을 아들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황제는 전국을 수소문해 파테푸크 시크리에 은거하고 있던 예언자 샤이크 살림 치슈티(Shaikh Salim Chisti)를 찾아낸다.

황야벌판에 몸소 찾아온 황제에게 샤이크 살림 치슈티가 내보인 것은 손가락 세 개. 이듬해, 악바르는 거짓말처럼 아들 제항기르를 얻는다. 평생에 얹혀있던 짐이 시원하게 내려간 악바르는, 기쁜 마음에 샤이크 살림 치슈티가 있는 허허벌판, 파테푸르 시크리로 수도를 옮겨버린다.

화끈하기도 해라. 하지만 아들을 얻은 악바르 황제의 기쁨이 얼마나 컸든 간에, 20여 개의 우물밖에 없는 곳에 50만 명 이상이 사는 한 제국의 수도를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뭄에 골치를 앓던 제국은 천도 15년 후, 도망치듯 다시 아그라로 수도를 옮긴다.

창에 실을 묶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악바르의 아들 타령의 결정체는, 붉게 솟아있는 파테푸르 시크리의 유적지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순백색으로 빛나는 건물이다.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이 건물은 예언자 샤이크 살림 치크티의 무덤으로, 악바르가 자신에게 아들을 점지해 준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a

악바르의 아들 타령의 결정체는, 붉게 솟아있는 파테푸르 시크리의 유적지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순백색으로 빛나는 건물이다.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이 건물은 예언자 샤이크 살림 치크티의 무덤으로, 악바르가 자신에게 아들을 점지해 준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 Dustin Burnett


촘촘하게 조각된 대리석 창 중앙에 난 입구를 따라 들어갔다. 작은 방 하나 정도 되는 공간이지만, 다른 유적지의 배가 되는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군중 속을 뚫고 들어가는 거라면 질색인 더스틴은 밖에 남겨두고, 홀로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관리인이 나를 맞았다.

"실 받아요. 저기 여인들이 하는 것처럼 실을 창에 묶으면 아들을 가질 수 있어요."

관리인이 울긋불긋하게 엮은 색동 실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어둠에 적응된 눈에 기도를 올리는 여인들의 모습이 비쳤다. 자신에게도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자신의 운명을 닮아야 할 딸은 원하지 않는다고 기도하고 있겠지.

인도 여인들이 딸을 원치 않는 데에는 '다우리'라 불리는 신부 지참금 풍습에 큰 원인이 있다. 다우리는 한국의 혼수와 비슷한 풍습으로, 결혼할 때 신부의 가족이 신랑의 가족에게 보내는, 새로 시작하는 가정을 위한 지참금을 말한다. 다우리에 해당하는 물품은 현금을 포함한 보석, 전자기기, 가구, 침구 등으로 한국의 혼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신부 지참금에 대한 부담감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라는 거다.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는 말이 있지만, 인도에서는 '결혼은 생의 무덤'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다우리의 부담 때문에 목숨을 끊는 여성들이 많다. 2000년대 초반 평균 신부 지참금은10만에서 15만 루피(230만~350만 원)였다고 한다. 신랑의 직업이나 지위에 따라서는 최고 1000만 루피에 달하는 때도 있다.

한국 기준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돈 같지만, 인도 근로자의 평균 연봉이 4만 루피임을 감안하면, 딸 하나를 시집 보내고 한 가정의 경제가 무너질 수 있을 만한 금액이다. 딸 여럿을 시집보내는 금액보다 초음파검사를 통한 낙태비용(950루피, 약 2만 4000원)이 덜 부담스럽다 보니, 불법 성별검사를 통해 낙태를 하는 경우도 많다.

a

샤이크 살림 치크티의 무덤 내부. 창가에 실을 묶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이 있어 인도 여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Dustin Burnett


a

샤이크 살림 치크티의 무덤 내부. 붉게 솟아있는 파테푸르 시크리의 유적지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순백색으로 빛나는 이 무덤은, 악바르가 자신에게 아들을 점지해 준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 Dustin Burnett


창가에 실을 묶는 여인들을 보며 한참을 상념에 젖어있다 나오니, 더스틴이 구겨진 눈썹으로 어둠 속에서 나오는 나를 맞이한다.

"이 작은 방안에 볼 게 그렇게 많아?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까먹었나?"

사실 까먹었다. 햇빛 아래 이글대는 더스틴의 빨간 볼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다.

"미안! 안에 있는 관리인이 말을 걸어서 얘기 좀 하다 늦었어. 관리인이 그러는데 뒤쪽에 있는 창문에 실을 묶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이 있데. 나한테도 주더라 그 실."

"그래서 묶었어?"

"안 묶었어. 너랑 상의도 없이 아들을 낳겠다고 덥썩 묶었을까봐 걱정인가?" 

"그 관리인은 너도 당연히 아들을 낳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제주도의 하루방 생각나네."

그렇지. 한국에서도 하루방의 코를 세 번 쓰다듬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둥 하는 설이 있지. 한국 역시 아들 아니면 자식 취급 손주 취급 안 하던 그런 날들이 있었지.

"그거 알아? 한국에서는 성별을 알려주는 게 불법이야."
"왜?"
"왜긴 왜야. 남자아이가 아니면 애를 지우니까 그렇지." 
"남자가 아니면 애를 지워?"

더스틴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나는 아들을 낳지 못해 몇 번이고 임신해야 했던 친척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더스틴은 자기가 그 친척이라도 되는 양 얼굴까지 붉어지며 흥분을 참지 못했다. 이런. 흥분해서 열변을 토해내는 더스틴을 진정시키기란, 악바르가 아들을 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인데 어쩌나.

a

파테푸르 시크리 로얄 콤플렉스.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파테푸르 시크리의 유적은 대부분 붉은 색을 띤다. ⓒ Dustin Burnett


a

파테푸르 시크리의 히란 미나르(Hiran Minar) ⓒ Dustin Burnett


"한국에서 아들을 원하는 이유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야. 악바르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도 다우리 비슷한 혼수제도라는 게 있지만, 인도처럼 혼수 부담 때문에 딸을 원치 않는 정도는 아니야. 아들도 그만큼 해야 하거든."

"다우리든 혼수든, 예전의 가족 중심적 농경 사회에서 그런 문화가 생겨났던 건 이해가 가. 오히려 좋은 풍습이었을 거야. 문제는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하면서 애초 그 문화가 생겨난 이유나 의미는 잊히고, 왜곡된 껍데기만 유지되고 있다는 거지."

"그렇지. 왜곡된 껍데기. 요새 한국에서는 남자는 집 한 채, 여자는 그 집안에 들일 가구나 가전 같은 혼수를 들이는 것이 보통이긴 한데. 뭐 결혼해서 새로 시작하는 가정이니 필요한 것들이긴 하지만, 그럴 능력이 안 될 경우라도 억지로 수준을 높여서 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게 문제지." 

"근데 집은 어떻게 마련해? 보통 결혼하는 나이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데. 그 나이에 돈이 그렇게 모여?"

"혼자 못하지. 스스로 마련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부모님이 마련해 주지. 그러니까 이 결혼을 반대하네 어쩌네 하고 부모님들이 자식 결혼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마구 휘어잡는 일도 가능한 거지." 

"한국에서 제일 어이없는 이야기가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해서 결혼을 포기했다는 이야기야. 만약 우리 엄마가 결혼을 반대했다면, 나는 '엄마 미쳤어요?' 하고 허허허 웃어주고 말았을 거야." 

간섭이라면 죽기보다 싫어하는 더스틴인데, 엄마가 결혼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면 어떤 투쟁과 참사가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a

파테푸르 시크리의 판치 마할(Panch Mahal). 4개 층으로 이루어진 이 궁전은 악바르 대제의 유희를 위해 사용되었던 곳이다. ⓒ Dustin Burnett


a

파테푸르 시크리의 유적. 본래 아그라를 수도로 하던 무굴 제국이 이곳 파테푸르 시크리로 천도 한 건 1569년의 일이다. ⓒ Dustin Burett


"너 사실, 나 같은 여자한테 장가올 거였으면 서울 강남에 10억 넘는 아파트 한 채 정도는 마련해 왔었어야 하는 건데, 많이 봐준 거다." 

"강남 아파트라…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는 거 아니야? 서울 강남에 10억 넘는 아파트 대신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주위를 잘 살펴봐."

작은 악마처럼 웃어 보이는 더스틴의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서 있는 곳은 인도의 허허벌판 시골이다. 그래 이 자식아, 나에게 어울리는 건 삐까뻔쩍한 초호화 아파트가 아니라, 아그라 기차역의 3등석 대기실이고, 먼지 날리는 길바닥이다!

a

파테푸르 시크리의 성곽 구역(Ruins City). 잘 정돈된 로얄 콤플렉스와는 달리 성곽 구역에는 무너진 성벽들이 있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 Dustin Burnett


a

유적 너머로 철길을 짓는 수작업 공사가 한창이다. 예쁜 사리를 입은 여인들도 함께 나와 바구니에 돌 무더기를 하나씩 하나씩 이어 나르고 있다. 그야말로 진짜 '수작업' 공사다. ⓒ Dustin Burnett


더러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삶의 풍경

다시 아그라로 돌아오는 길. 먼지와 오물이 말라붙어 뿌옇게 더러워진 버스의 차창 밖으로 인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장사꾼들은 야채를 늘어놓고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선명하게 푸른 녹색의 밭에는, 밭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 무리가 노랗고 빨간 점이 되어 길을 걷는다.

노점에서 과자를 파는 아이의 작은 손이, 과자를 사는 다른 아이의 작은 손에 물건을 건넨다. 길가에는 죽은 소가 쓰러져 있다. 죽은 소를 탐하던 개가 주춤하다 달려들어 소의 육질을 뜯어낸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 손자의 아장걸음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사랑과 희열이 가득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인도의 풍경 앞에, 잠시 나 자신이 부끄럽다. 삶의 모습이란, 버스 밖을 스치는 지금 이 풍경, 잔인하고 소박하고 절절한 이 풍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다. 하루하루의 생로병사를 담담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앞에, 내일의 더 많은 소유를 바라고, 내일의 안위를 걱정하는 나의 모습이 허황되다.

순간의 찬란함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내 가족의 안위를 위해 어깨를 동그랗게 말고 힘껏 릭샤를 모는 릭샤꾼처럼 값진 땀을 흘리는 사람이고 싶다. 멋지고 안락한 강남의 아파트보다, 먼지 날리는 인도의 더러운 길바닥을 선택하는 사람이고 싶다. 길 위의 뜨거운 햇볕과 내 몸을 이끄는 두 다리의 고통을 그리워하는 삶이고 싶다. 청량음료 한 방울의 짜릿함을 만끽하는 인생이고 싶다. 창 안의 안락함에 익숙하다가도, 어느 날 문득, 뚜벅뚜벅, 창문 밖의 더럽고 잔인하고 뜨거운 길 속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a

로얄 콤플렉스 바깥의 성곽 구역. 버려진 과거의 유물들 위로 밭을 일구고 염소떼를 모는 파테푸르 시크리의 삶이 도시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 Dustin Burnett


#파테푸르시크리 #악바르 #아그라 #인도 #무굴제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2. 2 대통령 온다고 수억 쏟아붓고 다시 뜯어낸 바닥, 이게 관행?
  3. 3 '한국판 워터게이트'... 윤 대통령 결단 못하면 끝이다
  4. 4 "쓰러져도 괜찮으니..." 얼차려 도중 군인이 죽는 진짜 이유
  5. 5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