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오른쪽)과 김일성
김일성도 스탈린처럼 개인숭배와 우상화에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숙청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는 남한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남로당계와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연안파를 숙청하고, 1960년대는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갑산파를 제거해 1인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그중에서도 남로당계 박헌영 숙청은 1인 독재의 잠재적 위협인 '2인자'의 제거라는 점에서 장성택 숙청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박헌영 당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1953년 8월 체포되어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됐다. 북한 권력 2인자였던 그는 '미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와 '공화국 정권 전복음모 행위' 죄목으로 기소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6·25 남침 실패에 대한 책임을 남로당계에 떠넘기고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정은 정권도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겸 당 행정부장에게 '국가전복음모' 혐의를 처형의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정은 1인 지배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8일 장성택을 체포한 지 나흘 만에 특별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형을 집행했다. 쿠데타 음모의 뿌리를 고구마 줄기처럼 캘 수 있는 데도 자백만 받고 '수괴'를 처형한 것 자체가 대중의 공포를 극대화하려는 '본보기 처형'임을 웅변한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한 특별군사재판 장면과 판결문은 박헌영이 체포된 60년 전보다 더 후진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분노와 충격을 안겼다. 체념하듯 고개를 떨군 장성택에게 수갑을 채운 오른 손에는 고문의 흔적 같은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장성택의 일체 범행은 심리과정에 100% 입증되고 피소자에 의하여 전적으로 시인되었다"는 확증은 고문이나 체념에 의한 조작임을 짐작케 한다.
김정은 정권은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했던 것처럼 정적을 제거할 때 단골 메뉴였던 '미제의 스파이'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지하자원을 망탕 팔아먹도록 하여 (공화국에) 많은 빚을 지게 하고, 라선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행위도 서슴지 않았다"며 장성택을 '매국노'로 규정했다. 그 무엇보다도 박헌영의 공개재판에는 선별된 청중들이 참석했지만 장성택의 군사재판에선 무표정한 법정서기 말고는 어떤 방청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김정일의 공포 정치, '심화조' 사건김정일 시대에는 이른바 심화조(深化組) 사건이 피의 숙청을 통한 공포 정치의 대표적 사례다.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3년의 '유훈통치'가 끝나자마자 1997년부터 '심화조' 사건을 일으켜 피의 숙청와 공포 정치로 1인 지배권력을 공고화했다.
심화조 사건은 1997년 8월 전 당 중앙위원회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가 '미국 간첩' 혐의로 평양에서 공개 처형되면서 시작됐다. 경찰에 해당하는 사회안전성 수사발표에 의하면, 서관히는 6·25전쟁 시기 경력 중 조직생활에서 이탈한 한 달간 공백이 있었는데 그 기간에 남한으로부터 간첩 임무와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회안전성은 나아가 6·25전쟁 당시 남조선 특수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최고사령부' 타격대 요원들이 타격에 실패해 평양 용성에 거주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잡혔다는 이른바 '용성 사건'을 일으킨다.
두 사건을 계기로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에 '주민 전체의 주민등록 문건 요해를 심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내 주민등록 문건부터 요해하라"는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받든 사회안전성은 전국 수백 개 하부조직에 8000명의 '심화조' 조직을 만들어 6·25 전쟁 당시 간첩사건을 조작해내며 김일성 시대의 고위 인사들을 숙청했다. 당시 심화조는 무자비한 고문을 이용한 조사방식으로 1997년 말부터 4년간 숙청한 인사와 그 가족은 2만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민생단 사건 |
'민생단 사건'이란, 해방 전 일제 비밀정보기관이 한인 공산주의 조직에 몇 명의 스파이를 침투시켰던 사건을 말한다. 초기에 곧 발각되고 소멸되었는데, '민생단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른다'는 소문 때문에 서로 의심하고 죽인 끝에 그 희생자가 정말로 수천 명에 달했다는 사건이다. |
그러자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는 심화조 사건으로 인한 민심 변화와 그 부정적 실태를 골자로 하는 정세보고서를 작성했다. 김정일은 권력기반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했던 '심화조' 사업이 본래의 취지를 넘어 사회적인 불안과 반감이 전파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김정일은 심화조 해산과 동시에 사회안전성의 전횡과 고문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중앙당 조직부 검열과를 조직하고, 심화조 지휘성원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어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을 현대판 '민생단' 사건으로 규정짓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사면조치를 지시했다.
김정일은 전국 강연회에서 사회안전성 심화조의 죄행을 폭로하도록 했다. 이에 주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사회안전성 안전원들은 군복을 입고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심화조 소탕작전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주모자로 지목된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등 네 사람은 현대판 반혁명종파분자로 처형되고, 전국의 '심화조' 소속 안전원 6000명은 출당 해임 및 수감되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인민을 탄압하는 조직이 되지 말고 인민의 생명을 보안하는 조직이 되라는 의미로 사회안전성을 인민보안성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대장에서 '원수'가 되지 못하고 '원쑤'로 추락한 장성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