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가 되겠다'고 외쳐도 애처롭지 않다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74] <깨꽃>

등록 2013.12.25 20:40수정 2013.12.25 20:40
0
원고료로 응원
나는 잠자는 일
잠 속의 일
쫓기어다니는 일
불같은 일
암흑의 일
깨꽃같이 작고 많은
맨 끝으로 신경이 가는 일
암흑에 휘날리고
나의 키를 넘어서―
병아리같이 자는 일

눈을 뜨고 자는 억센 일
단명(短命)의 일
쫓기어다니는 일
불같은 불같은 일
깨꽃같이 작은 자질구레한 일
자꾸자꾸 자질구레해지는 일
불같이 쫓기는 일
쫓기기 전 일
깨꽃 깨꽃 깨꽃이 피기 전 일
성장(成長)의 일
(1963. 4. 6)


수영의 산문 중에 <생활의 극복>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담뱃갑의 메모'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은, 제목 그대로 생활 속의 자잘한 일화와 소회를 바탕으로 수영의 인생 철학을 보여 준다.

머릿속의 담뱃갑의 메모를 빌려서 나는 요즘 조금씩 이런 연습도 하고 있다. 우선 새 학기부터는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는 말부터 하지 않기로 하자. 이를 깨물고 자식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자. (<김수영 전집 2 산문>, 95쪽)

이 글 뒤에 시인은 한 외국 시를 인용한다.

지금 나를 태우고 있는 것이 무언인가?
욕심, 욕심, 욕심. - 레트커의 시에서 (위의 책, 96쪽에서 재인용)

수영은 마음 속의 욕심을 없애야 자신의 시가 진경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딴사람'이 되고 싶었다. '딴사람의 시'를 쓰고 싶었다. 그는 '딴사람'이 좋았다. '딴사람'이라는 말을 쓰고 거기에 입을 맞출 정도였다.


그해 겨울, 수영의 집은 '욕심'과 '여유'의 흔적들로 넘쳐났다. 마루에 난로가 놓였다. 몇십 년만에 처음으로 무명 조선바지를 해 입었다. 조그만 통이지만 커피도 한 병 마련했다. 하지만 시인이 욕심과 여유에 빠지는 일은 최악이다. 그는 몸부림쳤다.

어느 날이었다. 집에 값비싼 피아노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밖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온 수영은 손에 도끼를 들었다. 들입다 안방으로 쳐들어간 수영은 피아노를 짓칠 기세로 씨근거렸다. 아내 현경이 찢어지는 소리로 '사람 살려'를 외쳤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사달이 창피해서 소심한 수영은 어둠 속에서 쥐구멍을 찾았다.


또 다른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수영은 술을 잔뜩 마셨다. 취한 수영은 집에 돌아와 '거지가 되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문득 잠을 자던 둘째아들 경이 깨어나 울었다.

"아빠 나는 거지 안 될래, 거지 싫어. 나는 거지 안 될 거야."

수영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경을 첫째 우보다 사랑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어린 경에게 자신의 '거지론'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시인은 어린 아들에게 사과하며 찬찬히 달랬다.

<깨꽃>은 "깨꽃같이 작고 많은 / 맨 끝으로 신경이 가는 일"(1연 6행)에 관한 시다. "깨꽃같이 작은 자질구레한 일 / 자꾸자꾸 자질구레해지는"(2연 5, 6행) '나'를 돌아보는 시다. '나'는 욕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인 자신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욕심에 관한 시다.

욕심, 그것은 수영에게 무엇이었을까.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위의 책, 96쪽)

<논어>에 실려 있는 공자의 말, "樂而不淫(낙이불음)하고 哀而不傷(애이불상)"이다. 수영은 예의 글에서 이 말을 담뱃갑 메모의 예로 소개한다. 그는 덧붙인다.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 욕심을 제거하려는 연습은 긍정의 연습이다. (위의 책, 96쪽)

수영은 도끼로 욕심의 상징인 피아노를 부수려 하였다. 어린 아들 앞에서 술 취한 채 '거지가 되겠다'고 외쳤다. 그의 몸부림은 처절하고 애달프고 간절했다. 욕심에 빠지는 일이 "불같은 일 / 암흑의 일"(1연 4, 5행)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자는 억센 일'(2연 1행), 심지어는 '단명(短命)의 일'(2연 2행)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일을 '성장(成長)의 일'(2연 10행)로 여겼다. 욕심에 빠지는 것은 분명 '슬퍼하되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욕심을 제거하려는 연습'을 '긍정의 연습'으로 삼고자 했다. '깨꽃같이 작은 자질구레한 일'에 빠져 있으면서도 '성장의 일'을 생각했다. 수영의 가슴에 있던 '도끼'는 그렇게 날을 번득이며 소심한 그를 다그쳤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깨꽃> #김수영 #<생활의 극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AD

AD

AD

인기기사

  1. 1 고장난 우산 버리는 방법 아시나요?
  2. 2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들... 서울도 예외 아니다
  3. 3 삼성 유튜브에 올라온 화제의 영상... 한국은 큰일 났다
  4. 4 마을회관에 나타난 뱀, 그때 들어온 집배원이 한 의외의 대처
  5. 5 "청산가리 6200배 독극물""한화진 환경부장관은 확신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