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의 공개 뒷담화... 안 당한 사람은 모릅니다

[세인트 존스 칼리지 이야기3] 시험 없는 학교, 학생들 벌벌 떨게 만드는 것

등록 2014.02.22 19:15수정 2014.08.0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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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기말고사가 있는 대다수의 대학들과는 다르게, 세인트 존스에는 시험이 없다.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학생들 중에 '이럴수가! 시험 없는 대학이라니! 그곳이 천국이 아니면 어디가 천국이란 말인가 할렐루야!'라고 생각하신다면 '오노~'.

시험이 없는 대신 세인트 존스에는 학생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다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돈 래그(Don Rag)'라 불리는 아주 특별한 학생 평가 제도다. 우선 어원부터 파헤쳐보면 돈(Don)은 영국에서 건너 온 단어로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를 뜻하는 단어다. 래그(Rag)는 영어 동사로 '꾸짖다, 책망하다, 타박하다'는 뜻이 있다. 즉, 돈 래그(Don rag)는 교수가 꾸짖는다는 뜻이다. 누구를? 당연히 학생을!

따라서 돈 래그는 말 그대로 교수가 학생을 꾸짖을 수 있도록 학교에서 마련해 준 공식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한 학기 동안 학생이 들었던 수업(4~5개)을 담당한 튜터(지난 기사에서 설명했지만, 세인트 존스에선 교수를 튜터라고 부른다)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다. 그래서 그 학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돈 래그다.

학생 앉혀 놓고 '뒷담화'하는 평가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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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먼 옛날(?)의 세미나 모습 ⓒ St.John's College


시험 대신 이런 학생 평가 제도를 채택하다 보니 세인트 존스에서는 학기가 끝나기 전 마지막 주인 월요일부터 일 주일간 '돈 래그 주(Don rag week)'가 시작된다. 학생들은 이 일 주일을 '죽은 주(Dead week)'라고 부른다. 월, 목요일 세미나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수업들이 취소되기 때문이다.

'방학 전 마지막 일 주일간 수업들이 캔슬이라고? 또 다시 천국이다!'라고 생각하신다면 또 다시 오노~. 이 천국 같아야 할 일 주일을 '죽은 주'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학교 생활과 공부를 잘해왔는가 여부에 따라서 죽음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학생들이 돈 래그에 벌벌 떠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너무 단순하다. 나에 대한 "객관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상상 속의 내 모습과 남이 보는 실제 내 모습의 차이를 알게 되면 어떤 때는 충격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즐거워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내 모습과 맞닥뜨린다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안 그래도 무서운 돈 래그를 더욱더 무섭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돈 래그의 스타일이다. 이 돈 래그는 '청문회' 스타일이 아니라 '뒷담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학생을 앉혀 놓고 "너 왜 수업시간에 항상 아는 척 만해? 얌마!"하는 것이 아니라 튜터들이 모여 앉아 그 한 명의 학생에 대해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 학생은 내 수업에서 맨날 아는 척만 해요", "아 그래요? 그 학생, 내 수업에선 맨날 졸기만 하던데?" 주인공인 학생은 그 자리에 있음에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

이런 학생을 투명인간 만드는 돈 래그는 세인트 존스에서 개발한 신개념 학생 고문(?) 방법이다. 왈핀(Walpin) 부총장은 "다른 미국의, 또는 이 세상 어떤 대학교들에도 없는 걸로 알고 있고, 있다면 세인트 존스에서 가져간 시스템"이라고 말하셨다. 이러니 학생들이 벌벌 떨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아직 누군가에게 적나라한 평가를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1, 2학년 때는 돈 래그에서 항상 눈물 콧물과 베프(베스트 프렌드) 먹고 방을 나오기 일쑤다. "그렇게나 혹독하게 평가를 하나?"한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눈물 콧물은 가혹한 평가를 받아서 나오기도 하지만, 예상치 못한 칭찬과 격려를 듬뿍 받을 때도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케이스였다. 1학년 때, 혹독한 평가로 눈물을 쏙 빼다가 예상치 못한 큰 칭찬과 격려를 한꺼번에 받아 또 다시 눈물 콧물을 흘리며 돈 래그장을 나왔었다.

병 주고 약 주는 돈 래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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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따스한 날 수업 전 모습 ⓒ St.John's College


지난 기사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공부면에 있어서는 특히 '겸손을 넘어선 자기 비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수업이 어려우면 전부 다 내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질문이 있어도 하지 못했던 적도 많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 내가 멍청해서, 게을러서 더 많이 공부하지 못했으니 나는 이걸 모르는 거야. 다른 애들은 분명 다 알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튜터들은 그런 내 성격까지도 다 파악을 하고 계셨다.

"미스 초(Cho:내 last name, 성이다)는 수업 시간에 좋은 질문들이 많은데 자기 혼자 모른다고 생각해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질문을 해 보면 다른 친구들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대답 못하는 그런 질문들인데 말이죠. 그러니 용기를 가지고 질문을 더 할 필요가 있어요."

"미스 초는 아폴로니우스(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의 3대 수학자, 원뿔곡선론의 저자)가 어려운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어려운 건데 말이죠. 허허허!"

"제 수업에서 미스 초는 아주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 배우고, 토론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넘어가는 학생들도 많은데, 미스 초는 항상 자신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질문하기 때문에 반 학생들은 물론 튜터에게까지 솔직함을 요구합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용기를 불쑥 불쑥 얻게 되고 "아아~ 튜터님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탭댄스라도 추고 싶어진다. 하지만 정말로 못하고 있는 수업에 대한 평가를 들을 때는 전쟁터에서 가슴에 화살을 맞고 "으윽~ 나의 죽음을 알리든 말든 나는 그냥 죽고 싶구나~"하는 전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맛볼 수 있다.

"미스 초는 이번 학기 모든 퀴즈에서 낙오했습니다. 희랍어 번역은 시키면 잘하고 준비도 되어 있게 보이지만 절대 나서서 하지 않습니다. 토론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아 플라톤 <메논>을 토론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겠고요. 페이퍼는 2개를 썼는데 2개 다 문법이 엉망이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심각하게 걱정이 됐습니다. 다음 학기에도 이대로라면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수업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화살을 감싸 안고 나와 다음 학기에 엄청 열심히 하면 다음 학기 돈 래그에서는 또 좀 더 나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많은 발전을 보였습니다. 페이퍼도 아주 흥미로웠고 퀴즈도 몇 개 빼고는 다 잘 봤습니다. 토론에도 더 참여하는 적극성을 보였으며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돈 래그는 내가 수업시간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객관적인 튜터들의 입장을 들을 수 있어서 엄청난 자기 비하를 하고 있다가도 돈 래그 때 튜터들의 얘기를 듣고 나면 용기를 가지기도 하고,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하고 합리화를 하다가도 혹독한 평가를 듣고 나면 '헐, 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계셨구나, 좋았어, 더 열심히 해야겠군'하고 스스로 채찍질을 하게 한다.

그렇게 돈 래그는 학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지만 튜터들에게도 학생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저 위에 나를 혹독하게 비판하셨던 희랍어 튜터님 같은 경우는 내가 항상 퀴즈에서 낙오하고 그런 안 좋은 학생의 모습만 보셨기 때문에 나를 세인트 존스에 전혀 맞지 않는 학생이라고 느끼셨을 상황이 크다.

하지만 다른 수업에서는 의외로 잘 하고 있는 내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튜터님들로부터 들으면 '오~ 저 학생이 내 수업에서만 못하고 있는 거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튜터들은 돈 래그를 통해 학생을 자기가 보는 모습을 가지고만 판단하지 않게 되는 큰 장점이 있다.

그렇게 세인트 존스 마지막 일 주일은 많은 교실들이 '평가의 장'으로 탈바꿈 된다.  이 기간은 튜터들이 너무나 바빠진다. 학생들은 자기 돈 래그 스케줄에 따라 그 시간에 한 번 짠~ 나타나 돈 래그를 하면 되지만 튜터들은 자기 수업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돈 래그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돈 래그가 가능한 소규모 학교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교수들이 어떻게 학생 하나하나의 성향까지 다 알지?" 하고 의아할 것이다. 사실 교수들이 자기 수업의 학생들을 다 알고 파악하고 있다는 건 우리나라나 미국의 큰 대학들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인문중심대학, 즉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들은 종합 대학(University)에 비해 소규모 학교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학교는 그런 리버럴 아츠 칼리지 중에서도 특히나 학생 숫자가 작다. 그렇기 때문에 돈 래그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작길래? 세인트 존스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합쳐서 400명도 안 되는, 심지어 고등학교보다도 작은 커뮤니티다. 1학년은 보통 120명 안팎으로 입학을 하지만 4학년까지 올라가는 학생은 겨우 절반 정도 되는 60~70명이다. 지금 내 학년(4학년)인 'class of 2014'도 73명밖에 안 남았는데 몇 해 전과 비교해 봤을 때 그나마 제일 큰 시니어 클래스라고 다들 뿌듯해 한다. 하여튼 이렇게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 그 도중인 2, 3학년 때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절반 정도의 학생들만 생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돈 래그는 학생을 불러다 놓고 평가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학생이 자신의 수업에서 각자 어떻게 하는지 튜터들이 뒷담화(?)를 하고 나면, 투명인간 취급 받던 학생에게도 드디어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튜터들이 한 얘기 중 자신을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 코멘트를 달기도 하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제일 중요한 돈 래그의 핵심, 결정의 시간이 온다. "이 학생이 다음 학기로 진급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나?"라는 질문에 의견을 종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한 명의 튜터라도 반대를 하게 되면 일이 커진다.

학생의 다음 학기 진학을 튜터가 반대하는 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학생이 수업 준비를 너무 안 해오고 경고를 줬음에도 결석을 너무 자주 했을 경우, 퀴즈, 페이퍼 쓰기 등 여러 숙제들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 세인트 존스의 토론식 수업이 학생의 성향과 맞지 않다고 판단이 되는 경우, 발전이 보이지 않는 경우 등등 많은 이유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곧장 쫓겨나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경우의 학생들은 조건을 달고 다음 학기 진학을 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학생은 다음 학기에 진학할 수 있지만 더 나은 페이퍼를 쓰기 위해 라이팅 어시스턴트(writing assistant)를 찾아가세요" 하는 식의 조건이 붙을 수 있는 것이다(라이팅 어시스턴트는 글쓰기를 도와주고 교정을 봐 주는 친구다. 수학, 음악, 언어, 글쓰기 등등 과목 별로 어시스턴트(assistant)라고 도우미 학생이 있다. 학교에서 그 분야를 잘 하고 있는 학교 학생들을 고용해 그 분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도와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나 역시 1학년 때는 페이퍼 문법 문제로 항상 라이팅 어시스턴트에게 가라는 조건이 달린 채 다음 학기에 진급할 수 있었다. 2학년부터는 더 이상 조건이 달리지 않아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또는 다음 학기에는 한 번도 결석을 하지 말라는 걸 조건으로 진학을 하는 학생도 있고 각자의 문제 종류에 따라서 다양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이게 바로 세인트 존스의 무시무시한 돈 래그다, 라고 돈 래그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만 사실 진정한 무서움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으니… 세인트 존스에서의 다음 학년 진학은 산 넘어 산이로세~ 이번엔 학생을 뺀 모~든 튜터들이 모여 2학년 학생 전원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3학년 진학에 대해 토론하는 '2학년말 특별 돈 래그', 안심하고 있던 3학년 1학기 때 (내가!) 쫓겨날 뻔했던 돈 래그 일화, 총장께 받은 무한 격려와 3학년 2학기부터는 돈 래그에서 진화된 컨퍼런스(conference)까지, 돈 래그 2부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개인 까페 (http://cafe.naver.com/nagnegil)에도 연재중입니다.
#ST.JOHN'S COLLEGE #세인트 존스 대학 #고전 100권 #토론 수업 #돈래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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