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무덤인 정릉. 성종의 무덤인 선릉과 함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김종성
그런데 정국공신 개정작업이 마무리된 지 4일 뒤였다. 개혁의 성공에 대한 기쁨이 조광조 진영에 아직 넘쳐나고 있을 때였다. 꿈속에서도 승리의 기분에 들떠 있을 그들의 단잠을 깨우는 일이 중종 14년 11월 15일(1519년 12월 6일) 밤중에 발생했다.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파 8인방의 집에 임금이 보낸 체포조가 들이닥친 것이다. 새벽에 열린 긴급 어전회의(일종의 비상국무회의)의 결과로 개혁파에 대한 일망타진이 단행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것은 조광조였다. 그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 그는 감옥 안에서 술을 들이키며 혼란스러워했다. 중종 14년 12월 16일자(1520년 1월 6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조광조는 심문을 받을 때도 만취 상태였다. '조광조는 술을 멀리하는 도인'이라는 소문을 의식했다면 간수들이 지켜보는 감옥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겠지만, 그때 그에게는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조광조는 임금을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요청했다. 주상 전하를 직접 만나면 해결될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중종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중종에게 그런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1506년에 왕이 될 당시만 해도 중종은 허수아비였다.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쿠데타 주역들과 함께 정변에 참여했다. 그래서 인조는 왕권을 행사하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종은 쿠데타가 성사된 뒤에 왕으로 추대된지라 발언권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중종반정 주역들이 자신과 부인을 강제로 이혼시키는 것까지 감내해야 했다. 중종반정 주역들은 중종의 조강지처인 신씨가 연산군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쿠데타 직후에 이 부부를 이혼시켰다.
하지만 중종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렬했다. 비록 남의 힘으로 왕이 됐지만 언젠가는 진정한 왕이 되겠다는 것이 그의 욕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때를 기다리며 숨죽여 살았다.
조광조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는...그렇게 산 지 9년 만에 중종은 조광조라는 대어를 발견했다. 과거에 갓 합격한 신진 관료가 보수파를 맹렬히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한눈에 반했던 것이다. 조광조(1482년 생)가 중종(1488년 생)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기 때문에 중종은 조광조에게서 형 같은 듬직함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조광조를 앞세우면 훈구파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공민왕이 신돈에게 했던 것처럼 조광조에게 개혁의 전권을 사실상 위임했다.
중종이 조광조를 참모 겸 대리인으로 발탁한 것은 훈구파를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의도는 상당 부분 성취되었다. 조광조는 온 열성을 다해 훈구파를 공격하고 그 자리에 신진 개혁파 관료들을 심었다. 개혁파가 훈구파를 능가함에 따라 개혁파의 후견인인 중종의 위상은 자연스레 올라갔다.
그런데 조광조와 중종은 동상이몽 관계였다. 중종은 자신의 왕권을 위해 조광조를 기용했지만, 조광조의 그렇지 않았다. 조광조는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군주의 힘을 빌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조광조는 스스로를 중종의 참모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중종이 자신의 수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광조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러자면 임금도 시스템에 따라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 조광조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서로 다른 꿈을 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언젠가는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가 추진하는 이상사회가 도래할 조짐이 보이면,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정국공신 개정운동 와중에 보수파가 몰락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때 어쩌면 그는 조광조의 이상사회가 곧 다가올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을 수도 있다. 또 그는 조광조가 하루에도 여러 번씩 경연(세미나)을 열어 밤늦게까지 자신을 붙들어두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조광조를 조종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또 중종 12년 8월 8일자(1517년 8월 24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조광조는 중종을 상대로 "며칠 전 경연 때 책 읽기를 힘들어 하시던데, 이것은 깊은 궁궐 안에서 마음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꾸짖었다. 평소 딴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이 모양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경계심을 품곤 했을 것이다.
중종은 갑, 조광조는 을... 그는 그걸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