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 <강연 100도씨> 강연 화면
KBS
"김재식씨 맞나요?""예, 그런데요.""여기 사인해 주세요!"병실로 택배가 하나 왔다. 얼마 전, 6월 29일 방송된 KBS1 <강연100도씨>(
98회 동영상 보기)에 출연했던 영상을 DVD로 보내왔다. 삶의 기념품이 하나 늘었다. 힘든 시간을 잘 견딘 훈장쯤으로 느껴진다. 그 방송이 나오던 시간 나는 아무도 없는 휴게실로 피했다. 내가 한 강연이지만 어쩐지 쑥스럽고 다시 본다는 게 민망했다. 아내가 내게 "무지 긴장하고 떨더라?"라고 놀린 말이 떠올라서 더 그랬다.
조용한 시간, 나 혼자 다시 보았다. 그때는 녹화하고 긴장하느라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비로소 내용이 집중이 된다. '아, 정말 나만 힘들고 괴로움을 버티며 보낸 줄 알았더니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온 가족이 합심해서 죽을힘으로 견뎌왔구나!' 새삼 가족들이 고마웠다. 누구 한 명만 삐긋해서 못 살겠다! 하고 일이라도 저질렀다면? 도저히 지금 이만큼이라도 안정된 투병, 간병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번 강연을 계기로 돌아보니 가족이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넘기면서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 같다. 누구는 뿌리 역할을 하고, 또 누구는 기둥, 가지 역할을 하고, 그 끝에서 또 누구는 꽃으로 열매로 여물어가는 나무처럼.
[봄] 우리 가족에게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다가온 계절2008년 5월, 그해 봄은 유난히 찬란했고, 동시에 지독히 우울한 추락이 동시에 일어났다. 막내딸은 그해 열린 제 19회 전국양궁대회 초등부(여자)에서 4개의 금메달 중 3개를 따고 개인전·단체전 우승을 했다. 나머지 하나도 동메달을 따서 학교와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렇게 찬란했던 그 봄, 5월 9일 아이 생일날 아침에 아내는 새로운 먹구름을 끌고 와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넉 달, 거의 산 송장이 되도록 심각해져 버린 아내는 이후 몇 번이나 더 재발해서 서울 큰 병원의 응급실을 들락거렸다. 최종 진단은 희귀난치병 '다발성경화증'이었다. 충주의 한 한방대학 과장이 제발 다발성경화증만 아니기를 빈다던 그 병이었다.
우리는 그 봄이 오기까지는 아주 평범하고 조용한 가족이었다. 별나게 안 죽고 살아야겠다는 각오같은 것도 필요 없었고, 그저 습관적으로 나날을 보내던 상태였다. 하지만 아내의 발병 이후 우리는 다시는 그렇게 호락호락 봄을 맞이하고 되는 대로 편히 보낼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 봄마다 산에 노랗게 물드는 산수유가 참 미웠다. 우리는 여전히 콘크리트 병원에 갇혀 나가지도 못하고 사는데 계속 사람들을 산으로 와보라고 손짓하는 산수유가, 그 봄이...
[여름] 이산가족이 되고 혹독한 폭염을 견디던 계절아내의 병세는 지독히 심한 편이었다. 발병한 지 수년 된 분들도 직장도 다니고 불편한 대로 살림도 살아내는 모습은 우리에겐 꿈같은 상태였다. 3번, 5번, 그렇게 재발이 오면서 소변도 막히고 배변 신경도 마비되었다.
처음으로 하늘을 원망했다. 아내조차 원망스러웠다. 아내 때문에 24시간 붙어있느라 직장도 접어야 했다. 그러니 수입도 없는 우리는 병원비를 감당 못해 집을 팔아치우고, 그리고도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빌린 돈은 갚을 길 없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악몽도 세상에 그런 악몽이 있을까?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존을 연명하다시피 지내야 했다. "어떻게 지내니?"라고 묻기가 무섭고 미안해서 아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들은 뜨거운 살인적 계절을 용케도 이기며 지나갔다. 목마를수록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수분을 줄기와 가지로 공급하는 나무들처럼, 우리 가족들도 그렇게 시련 속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며 생존능력을 키우며 자라고 있었다. 때로는 지독한 환경이 지독한 훈련이 되어 강해지기도 하나보다.
[가을] 열매는 밤과 낮, 비바람을 이겨서 여문다스무 곳이 넘는 병원을 유목민처럼 떠돌면서 재활치료와 항암주사로 관리하는 동안 완전 식물인간에 가까웠던 아내는 팔 다리에 조금씩 움직임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절망적인 불변의 상태로만 보였지만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거짓말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가을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들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여물게 하는 계절처럼 우리 가족이라는 나무에도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길고 혹독한 여름을 견딘 대가로... 열매가 여물기 위해서는 낮의 태양만이 아니라 밤의 이슬도 필요하다. 시원한 바람과 푸른 햇빛만이 아니라 차가운 비와 세찬 바람도 이겨내야 한다.
우리 가족도 다를 리 없었다. 마지막 시기를 잘 넘기지 못 하면 풋열매로 버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도 길어지는 독립생활이 가져오는 위태로움들이 문득 나타나곤 했다.
[겨울] 다시 봄을 볼 수 있을까? 살얼음판을 딛고 걸어가는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