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탑을 쌓고 있는 임재춘 조합원
임재춘
8년 전 농성하지 않을 때, 임재춘 조합원은 초등학교 동창회 자리가 마냥 좋았다고 한다. 어릴 적 동무들을 만나는 자리는 유년의 기억과 일상의 소소함을 나눌 수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일은 힘들었지만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노조 이야기도 없었고, 자신은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해고는 많은 것들을 앗아갔고, 임재춘 조합원은 7년만의 동창회에서 또 다른 것을 잃고 왔다. 자존심을 잃고, 대신 자격지심을 얻었다.
평소에도 임재춘 조합원은 남들 앞에서 먼저 말하거나 뜻이 다른 사람에게 반박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게다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과거의 자신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는 오늘의 자신은 그렇게 많이 누추했던 모양이다. 안 봐도 비디오인 그 형국, 꿀 먹은 벙어리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음이 영 그렇고 그렇다.
다른 농성자에게도 물어보았다. 옛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내냐고. 정리해고 이후 다들 친구들과의 만남은 줄었다고 한다. 일정도 바쁘고, 만나면 고생한다고 말하면서도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다. 친구들의 권유는 해고자이자 농성자들에게 위로가 되기보다는 설전의 소재가 되거나 그냥 피하고 싶은 것들이다.
원리원칙 지키고 노동법 지키면서 회사 운영하는 사장이 어디 있냐, 원래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는 이야기. 듣는 해고자의 입장에선 어디서부터 설명하고, 어디까지 따져 물어야 하는지조차 막막한 높은 벽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가지 않는 친구 모임.
지갑이 텅 빈 채 친구 모임에 가는 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임재춘 조합원은 그렇게 우울하기 짝이 없는 동창회 모임 이후 그때 오고갔던 친구들과의 대화를 떠올리다 또 우울해지곤 했다. '동창회 울렁증'을 경험한 임재춘 조합원에게 콜텍지회의 다른 두 사람은 이런 말을 전해달라고 한다.
김경봉 조합원 : "야, 원래 동창회는 있는 놈들이 좋아하는 자리야. 가지 마. 차라리 마음 맞고 너 알아주는 사람들이랑 따로 놀아. 뭐 하러 거까지 가서 맘고생 하냐."이인근 지회장 : "친구는 친구야. 너는 너고. 너의 자격지심이 문제 아니겠냐. 갈라면 당당하게 가고, 갔으면 재미있게 놀다와."임재춘 조합원은 술자리며, 친구들과의 긴긴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이왕 하는 위로, "우리가 놀아줄게"라는 약속도 얹어주면 좋을 텐데.
콜텍 해고자들이 대법원 판결에서 패소하자 많은 사람들은 염려했고, 농성자들에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그 덕분에 세 명의 콜텍지회 농성자들은 지난 주 3박 4일 동안 지리산 부근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 3박 4일은 세 명의 농성자가 한 번의 말다툼 없이 지낸, 기이하고 즐거운 사건이었다. 앞으로도 이어질 이 긴긴 농성에서 가끔은 그렇게 여유도 부려 서로가 잃어버린 친구 몫을 대신해주면 좋겠다. 이번 여행에서 임재춘 조합원은 뱀사골에 작은 소원탑을 쌓고 왔다. "재춘아, 무엇을 빌었냐?" 이렇게 물어준다면 그 소원탑보다 높게 살가운 우정이 쌓일지도 모를 일이다.